잘 자라고 있다
“엄마, 엄마는 내가 사춘기인 거 같아?!”
일주일 전 저녁에 올해 5학년이 된 딸이 갑자기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벌써 5학년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갑자기 왜 묻지 궁금하면서도, 별로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기에, 단번에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 사춘기 아닌 거 같은데.”라고 말하면서, 아차… 뭔가 있나? 싶은 찰나,
“나는 내가 사춘기인 것 같아.”라고 한다.
“사춘’기’가 아니라 애’기’ 아냐?”라고 장난으로 물었더니, 책 하나를 들고 와서 사춘기 체크리스트를 펼치면서, 그 체크리스트 결과를 근거로 본인이 사춘기 같다고 하는 거였다.
가지고 온 책은 정재승의 인간탐구보고서 4권이고, 이 책 138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사춘기 체크리스트가 있다.
친구들이 산 옷은 나도 사고 싶다.
좋아하는 이성친구가 생겼다.
나도 모르게 부모님께 자꾸 짜증을 낸다.
가족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다.
방에 있을 땐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손에서 핸드폰을 놓을 수 없다.
아주아주 사소한 것에도 쉽게 화가 난다.
샤워는 30분 이상이 기본이다.
불쑥불쑥 화가 났다가도 금방 괜찮아진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부모님과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거울 보는 시간이 늘었다.
모든 일이 귀찮고 지루하다.
몸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커졌다.
여기서 체크되는 번호의 개수가 8-11개면 사춘기인 것이 확실하고 12-14개면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다는 설명이 나와 있다.
딸이 이 체크리스트 만을 근거로 한 것인지,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이걸 하나하나 같이 짚어보았다.
친구들이 산 옷은 나도 사고 싶다.
이건 아니란다. 당연히 아니지… 내 딸은 단벌신사이다. 미니멀리스트인지… 계절별로 바지 두 벌(같은 걸로 두 개) 반팔티도 내가 입던 거 4-5개를 일 년 내내 입고, 그 위엔 계절에 따라 패딩이나 후디를 입는다.
좋아하는 이성친구가 생겼다.
요건 맞다. 바로 며칠 전에 좋아하게 된 남자 사람 친구가 생겼다고 나에게만 살짝 이야기해주었다. 귀엽귀엽.
나도 모르게 부모님께 자꾸 짜증을 낸다.
요건 좀 해당된다고 한다. 엄마가 알면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가끔 엄마 아빠가 말하면 짜증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 사춘기라서 그런 거구나. 다행이다- 사춘기 지나면 그럼 안 그러겠네~라고 했다.
가족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다.
요것도 해당사항이란다. 요즈음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잘 놀기도 하고, 친구들 데리고 편의점 가서 용돈으로 뭐 사주고 그런 걸 좋아하는 거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엄마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
방에 있을 땐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주로 과제든 놀이든 부엌 식탁에서 하지만 예전보다 방에 들어가서 슬라임 하면서 잠뜰TV 보는 자신만의 힐링을 하는 횟수가 늘긴 했다. 요것도 체크!
손에서 핸드폰을 놓을 수 없다.
이건 아니다. 딸의 폰은 스마트폰이 아니고 인터넷도 안돼서 핸드폰에 대한 애정도가 떨어진다. 심지어 문자도 전송이 잘 안 된다…
아주아주 사소한 것에도 쉽게 화가 난다.
이건 요즘 ‘빡친다’는 표현을 가끔 쓰는 걸로 보아 그런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하신다 ㅋㅋ
샤워는 30분 이상이 기본이다.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데, 요새 자기는 샤워를 오래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생각해보니 정말 예전보다 오래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항상 머리는 내가 감겨준다…(엄마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데 사춘기 맞나 싶음) 아무튼 체크.
불쑥불쑥 화가 났다가도 금방 괜찮아진다.
이것도 그렇다고 한다. 화장실 불 안 끄는 아빠, 물 안 아끼는 엄마…를 보면 그런가 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이건 아닌 거 같단다. 취침시간 10시 정도면 아닌 거 같고 주말 기상도 7-8시인 거 보면 아닌 듯. 그래도 요샌 아침에 졸리다고 하는 걸 보니 한창 클 때인 거 같다.
부모님과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고민하지 않고 이건 아니라고 해서 다행이었다.
거울 보는 시간이 늘었다.
몰랐는데 그렇다고 한다. 중요한 건 딸 방에 거울이 없고, 미니 옷장에 Ikea에서 산 붙이는 거울 붙여줬는데 그걸 자주 보나보다.
모든 일이 귀찮고 지루하다.
조금 그러하다 하신다.
몸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커졌다.
이건 확실히 정말 최근 들어 그런 것 같다. 나에게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ㅎㅎ 체크-!
이렇게 10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체크가 돼서 사춘기인 것으로!!
사춘기라…흐음…
내가 보기엔 아닌 거 같긴 하지만, 딸이 본인이 사춘기라고 하니까,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잘 자라고 있다는 표시니깐 말이다.
그렇다면
파티를 해야지!!
사춘기 커밍아웃을 한 것이 목요일 저녁이었고, 나는 금요일에 급, 그다음 날인 토요일에 열어줄 ‘사춘기 파티’를 준비했다.
파티 풍선과 케이크를 준비하고,
내 마음이 담긴 카드를 썼다.
우선 엄마한테 사춘기인 것 같다고 이야기해줘서 정말 고마워. 왜냐면 엄마는 정말 몰랐거든. 엄마가 워낙 눈치가 없잖아.
그리고 정말 축하해. 우리는 모두 크고 작게,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사춘기를 겪잖아. 크는 과정이고 잘 자라고 있다는 거지.
“삶은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정이다”라고 에리히 프롬이 말씀하셨거든. 사춘기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많이 생각하고 배우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힘든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이야기해줘. 글로써도 되고. 말 안 하고 싶으면 말이야.
엄마는 사춘기든 아니든 관계없이, 사춘기일지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쁜 마음까지도 전부,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멋진 사춘기를 응원할게.
그 주 토요일 저녁, 풍선과 케이크까지 집안에 들이고, 딸의 소울 푸드인 떡볶이까지 준비해서 real로 파티를 열고, 내가 만든 포토라인에서 사진도 찍고 케이크에 초를 켜면서 축하한다고 했더니,
딸은 “정말로 이렇게 파티를 한다고?” 하면서 은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정말로 축하할 일이고,
그래서 정말로 파티를 하는 거야.
오래오래 기억되라고.
사춘기가 문 쾅 닫고 은신처인 방으로 들어가는 것 만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는 성장하는 과정이고 성장을 위한 변화를 온전히 겪어내는 데 있다는 것을, 이러한 리츄얼로라도 기억했으면 했다.
P.S. 저녁마다 같이 게임하고, 아직 혼자 자지도 않고, 잠들기 전 30분간 엄마와 수다를 떨며, 언제까지 어린이날 선물을 받을 수 있냐고 묻는… 걸로 보았을 땐, 아직 사춘기는 확실히 아닌 거 같지만. 본인이 사춘기라고 하니, 그래, 사춘기라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