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맥주에 도전하다> 다큐리뷰
한국 맥주란...
한국의 평범한 20대로서 맞닥뜨리는 맥주는 마치 음료라기보단 스포츠의 느낌이 있었다.
500cc의 호프를 누가 더 빨리 마시는지 경쟁하거나, 1700cc 피처를 한 번에 마실 수 있는지 테이블을 두드리며 관전하기도 했다.
소주와 맥주의 비율을 따져가며 다양한 퍼포먼스와 함께 말아서 죽음을 불사하듯 들이키는 과정까지
이다지도 전투적인 음주 문화에서 누구도 맥주란 음료에 있어서 '취하기 위한 매개체'가 아닌 '맛'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맥주와의 조우
그러던 언제부턴가 대형마트에 처음 보는 다양한 수입맥주들이 4개 만원이란 가벼운 가격으로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이태원 어느 골목에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맥주들이 등장해 회자되고 있었다.
소문을 듣고 녹사평역에 내려 터널 쪽으로 따라내려 가는 골목을 방문해보니
지리산, 남산, 설악산 등 한국의 산 이름을 딴 맥주들을 파는 '크래프트웍스 탭하우스'나
멀쩡한 주택 골목가에서 외국인들이 맥주잔 하나씩 들고 서서 마시는 풍경의 '맥파이'
옛날 우리 동아리방 의자도 여기보다는 편하겠다 싶은 '더부스'까지
'호프집'이라기엔 훨씬 신선한 모습의 수제 맥주집들을 볼 수 있었다.
동행은 없어도 이곳을 소개해 준 온라인 게시판의 닉네임들에게 인증 사진을 남기며 댓글을 벗 삼아 혼자 에일 맥주를 즐기는 것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그로부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제맥주의 열풍은 미디어에 오르내리며 전국으로 확산됐다.
앞서 언급한 브루어리(양조장)들은 지점을 빠르게 늘리며 세를 키웠고, 다양한 맥주 브루어리들이 앞다투어 투자받으며 시장은 뜨거워졌다.
한국의 수제맥주 확산은 법 개정으로부터
맥주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주류가 한국 시장에서 이토록 빠른 변화를 겪은 배경엔 법 개정이 있었다. 주세법 등 주류에 관한 제도적 변화가 소규모 맥주 브루어리의 활성화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합법적으로 맥주를 양조하기 위해 거대한 시설을 완비해야 하거나, 기본 유통해야하는 맥주의 양의 기준이 높다던지, 브루어리 외의 장소에서 맥주의 매장 외의 유통 및 판매를 금지한다면 소규모 브루어리들의 확산은 힘들다. 제도의 변화와 사람들의 호응에 힘입어 현재는 소규모 브루어리에서 시작한 업체의 맥주들이 마트와 편의점에까지 진출할 정도로 영역을 넓혔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맥주는 온 나라를 통틀어 손에 셀 수 있을 정도로 소품종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맥주 양조에 대한 다양한 제도적 장벽을 허문 것이 이토록 큰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수제 맥주 문화
최근 한국 수제맥주 시장의 변화를 주도한 IPA 등의 에일 맥주의 본고장인 미국의 경우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적이 있다.
1970~80년대의 미국만 해도 소위 BMC(Bud, Miller, Coors) 맥주회사들의 독과점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전 미국의 양조장 개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던 1978년 카터 대통령이 1919년 금주령 이후 금지되어 왔던 홈브루잉 금지 해제 법안에 서명을 했고, 이후 콜로라도 등 미국 각지에서 일어난 크래프트 비어 운동이 현재 미국의 창의적이고 방대한 맥주 문화를 만들어냈다. 물론 생계를 위해 시작한 브루어리 사업일 수도 있지만, 그 수제맥주 문화를 주도한 브루어리 장인들의 열정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다큐 <수제 맥주에 도전하다>
<수제 맥주에 도전하다>는 이 브루어리 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이다. '시에라 네바다', '오스카 블루스', 'Upslope' 등의 미국 수제맥주 브루어리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막 재미가 넘치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심사가 맞지 않는 이는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브루어리 장인들의 맥주를 양조하고 팔면서 겪고 느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잔잔하게 담았다.
하지만 수제맥주를 즐기고 관심 있는 이라면 즐길 수 있는 다큐이다. 실제 미국 브루어리의 시설과 모습들을 보는 것 외에도, 미국 수제맥주 문화의 독특한 발전 과정과 고민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브루어리 장인들이 열정적으로 쏟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뭔가 기분 좋은 것이 있다.
이 다큐에선 수제맥주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각 지역 사회에서 특색있는 맥주를 양조하는 브루어리들은 그 지역 사회의 캐릭터가 될 수 있는 맥주 문화를 생산해낸다. 어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전국으로 유통되는 대형 기업의 맥주와는 달리 소규모 브루어리는 훨씬 지역 사회에 기반해 지역 경제와 융화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그 지역 브루어리들이 생산된 맥주를 그 펍에서 사람들이 소비하고, 그 사람들로부터 맥주의 맛을 피드백하며, 펍에 모인 사람들끼리 또 서로 교류하며 생기는 커뮤니티는 특별한 가치가 느껴진다.
또한 다큐 전반에 흐르는 어쿠스틱한 음악은 여러 브루어리 씬들과 무척 어울린다. 펍 한켠에 전시하듯 상영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에, 어쩌면 특별할 건 없는, 수제맥주 펍에서 사람들이 어울리며 대화가 흐르는 씬은 다큐 전체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반영하는 듯하다. 수제맥주 문화가 만들어낸 생태계와 같은 어울림을 흐뭇하게 다큐를 따라가며 즐겨보는 것도 제안해 보고 싶다.
이 다큐는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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