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약초꾼의 철학
28살쯤에 출산하는 꿈을 꾸면서 실제로 아이를 낳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에서 느낀 출산의 과정은 뼈마디가 열리고 아프다 못해 우주 멀리까지 고통이 뻥~ 터지는 무한대가 되는 순간을 경험했어요. 실제로 심장이 2개였던 10달 동안의 잉태의 경험은 몸 안에 생명체를 품을 수 있는 능력자로 사는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궁과 유방을 가진 존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집에서 세 아이를 놓았습니다. 그 아이들의 태반은 각각 집 근처의 의미 있는 나무 아래 고이 묻었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농민이자 부모가 되어 보니 작물을 키우느라 분주한 시기에는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된다는 두세 돌 무렵까지 충분히 아이를 돌보고 나서 어린이집에 보내면 좋겠지만 언감생심이지요. 바쁜 농번기에는 어쩔 수 없이 돌이 안 된 아이도 어린이집에 맡기는 농가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논밭 근처 나무에 밧줄을 달아 아이 허리춤에 묶어 놓고 일했다고도 전해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간단히 뒷정리하고 나면 해가 높이 뜨는 오전 10시가 됩니다. 오후 4시에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농사일을 하려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는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밭일을 하려면 이 시간에 일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이가 있는 농촌 여성은 대부분 ‘농사, 가사 노동, 육아’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살아갑니다. 남편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돈을 벌고 아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육아를 담당하는 전통적인 성 역할과 달리 부부가 함께 벌고 같이 아이를 돌보면서 사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돌봄의 비중은 꽤 다릅니다. 여성 농민은 잠잘 때도 언제 깰지 모르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은연중에 대기하며 잠을 잡니다. 물론 방학이 되면 돌봄 노동 시간은 더욱 증가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 농민은 자신을 돌보며 충전할 여유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이와 같이 강행군이 계속되면 ‘내가 무슨 일인들 못하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기혼 여성 농민이 경제적 자율성이 주어지지 않은 채 이러한 과중한 노동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더욱이 30∼40대 여성 농민의 삶은 중장년 및 노년 여성 농민의 건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밭을 매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고 며칠도 안 되어 김을 매러 다녔다.’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전해 들었지만 이와 동시에 ‘그때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몸이 망가졌다.’라는 한 맺힌 소리도 듣습니다. 기계처럼 일을 잘하는 여성 농민들을 보고 ‘대단하다’라고 칭찬하기에는 골병이 깊이 든 여성농민이 많아 안타까움을 넘어 울분과 걱정이 됩니다.
이제는 ‘농어가 도우미 제도’가 있어 임신이나 출산을 한 여성의 노동력을 대신할 도우미 인건비로 90일 동안 지원금이 나옵니다. 또 여성 농민이 농업경영체로 등록되어 있고, 출산 전에 3개월 이상 소득 발생이 확인된다면 ‘출산 급여’로 월 50만 원씩 3개월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3개월 동안의 복지 정책만으로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나마 남편만 농업경영체로 등록되어 있거나 자신의 통장으로 거래하지 않는 여성 농민들은 출산 급여를 받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아이들이 커가는 앞날은 더욱 걱정이 됩니다. 제가 사는 면에서는 2020년에 우리 셋째 아이를 포함해 아이가 총 4명만이 출생했습니다. 건넛마을에서도 아이가 없어 어린이집이 없어지고, 어린이집이 없어져 아이가 없는 마을이 되는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단지 민간 운영 기관만의 사정이 이러한 것은 아닙니다. 국공립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의 사정도 대동소이합니다.
작은 학교는 한 학년에 10여 명으로 한 반뿐입니다. 1학년 때 만난 10명 안팎의 친구가 6년 동안 이어집니다. 어린이집부터 중학교까지 면 단위에 1개씩밖에 없기 때문에 10여 년 동안 또래 집단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새 학년이 되어 반이 바뀌면서 재구성되는 친구 관계에서 오는 설렘이나 새로 친해지는 적응 과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 발달하는 사회성 부분은 신경이 쓰입니다.
매년 학생 수가 조금씩 줄어 10년 전에 100명을 웃돌았던 전교생은 이제 70명 정도입니다. 학교는 끊임없이 변모해 실내 놀이터, 스크린골프장, 목공실, 레고와 보드게임방 등을 갖추었지만 학부모 참관 공개 수업에서 교감 선생님은 “학생 수가 90여 명 정도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좋은 학교 시설을 주변에 적극 알려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하십니다. 졸업생보다 신입생이 현저히 줄고 있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닌 것이지요.
막내가 초등학생이 되는 5년 뒤에는 과연 이 초등학교에 아이가 몇 명이 다니고 있을지 염려됩니다. 땅에 뿌리를 내린 농부이지만 아이들을 중심으로 삶을 재편해 나가는 학부모로서 교육 환경은 상당히 큰 이촌(離村) 동기가 됩니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가족이 모두 도시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회가 많고 폭넓은 경험을 할 수 있는 ‘큰 물에서 놀아라.’라는 말이 있지만 그럼에도 농촌에 위치한 작은 학교를 찾는 이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아이들과 모내기를 하고 씨앗을 뿌려 땅과 작물을 돌보며 키워 먹는 일과 놀이의 경계에서 생태감수성을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땀 흘려 먹는 밥의 의미를 몸으로 깨우치게 되므로 흙에 뿌리를 내린 어린 시절의 경험은 어른이 되어 밑거름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역 주민들도 입버릇처럼 ‘아이를 온전히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이장 회보나 마을 정책을 살펴보면 미래 세대인 농촌 아이들과 청소년의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움직임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농촌의 작은 씨앗인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을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발굴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여전히 돌봄 가치가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치부되고 있으며, 가사와 육아를 여성 농민에게 주로 책임을 지우는 성별에 따라 역할을 분리하는 체계가 견고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태의연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애 주기별로 돌봄 시스템과 정책을 촘촘하게 만든다면 문화, 복지, 인구, 경제 등 다방면에서 발생한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후대의 기혼 여성 농민들은 건강과 일, 육아와 농사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갈림길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누구라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에서 즐겁게 농사를 지으며 충분한 육아가 가능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