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몰랐다. 다니는 길 곳곳에 꽃집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형형색색의 꽃들이 즐비해있어도 내게는 그저 회색이었다. 좀처럼 소비할 일 없는 물건들이 가득한 진열대 앞을 영혼 없이 지나가는 대형마트의 고독한 카트라이더 같았달까. 요즘은 익숙한 길목 위 아담한 꽃집 쇼윈도 너머로 활기가 도는 꽃봉오리들을 마주할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면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이번에는 프리지아를 사볼까?
리시안셔스와 튤립, 거베라와 라넌큘러스가 그 사람의 꽃병에 머문 시간만큼 내 일상이 조금씩 변화하였음을 실감한다. 땅에 발이 닿을 듯 말 듯, 무릎이 안쪽으로 굽혀질 듯 말 듯 싱거운 발짓으로 일상의 그네를 타던 나의 스윙 반경이 넓어진다. 예각이 직각을 너머 둔각이 되는 것을 느끼며 생각한다. 사는 게 원래 이렇게 시시하지 않은 일이었나.
고요하다 못해 멈추어버린 것만 같던 나의 일상 속에 들어온 그 사람은 아무래도 펜듈럼을 만들고 있나 보다. 우리의 관계는 과연 끊임없이 진자운동을 하는 키네틱 아트가 될 수 있을까. 당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히 먼 미래를 그리게 되는 나의 오만함에 경종을 울리다가도 그 달콤한 오만에 과감히 잠겨버리고 싶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저 잔망스러운 펀치라인의 참 뜻을 알게 된 것 같다.
예전에는 몰랐다. 제 색깔을 잃지 않으며 예쁘게 시들어 가는 꽃도 있다는 사실을. 곱게 잠든 당신의 어깨너머 새하얀 테이블 위, 동그마니 앉아있는 작은 꽃병 안에서 천천히 시들어 가는 노란 프리지아를 보며 문득 생각한다. 예쁘게도 만개하더니 예쁘게도 시드는구나, 나도 너처럼 예쁘게 시들어 가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이 사람과 함께.
2021년 4월의 봄에
당신을 생각하며 K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