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식상한 시작
생각해 보면 처음의 기억은 썩 좋은 게 없다. 대신 강렬한 임팩트는 있었다. 나는 필라테스 첫날에 수업 도중 급격한 현기증과 복통을 호소하며 뛰쳐나간 전적이 있고, 애들이 타는 거라고 우습게 보던 수동 킥보드를 타고 힘차게 달리다가 2킬로미터를 채 못 가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길에서 쓰러질 뻔하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 건강체질이라고 여겼지만 아무래도 머나먼 학창 시절의 기억에 메여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알고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던 것인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일상에 쫓겨 몸을 소홀히 한 나머지 이제는 조금만 격한 활동을 하면 급격한 피로를 느끼는 나약한 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아, 원통하다.
달리기는 나와 인연이 없었다. 살면서 달리기에 두각을 나타낸 적도 없고, 심지어 학창 시절 체력장에서 기록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유일한 종목이 오래 달리기였다. 거친 숨소리, 욱신거리는 다리, 목에서 느껴지는 피 맛으로 기억되는 무시무시한 그 이름, 달리기. 질색할 만도 하다.
그런데 질색이었던 달리기를 갑자기 왜 시작했냐고 하면 사실 할 말은 많지 않다. 대단한 계기가 있어서 재미있게 썰을 풀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너무나 재미없는 사람이다. 킵초게라는 유명한 마라톤 선수를 보면서 감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문득 하천을 달리고 있는 동네 러너를 보고 자극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자는 다짐을 했다는 것, 퇴근이 앞당겨져서 이전보다 활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것, 그래서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을 찾다가 인터넷에서 러닝을 추천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식상하긴 해도 어쩔 수 있나. 그게 시작인 것을.
어쨌든 나는 달리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하게도 달리기 초보에게 거의 필수 어플이라고 할 수 있는 런데이의 도움을 받았다. 만약 20대의 내가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30분 달리기 도전'이라는 8주짜리 프로그램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을까? 물론 더 젊고 건강하기는 했어도 왠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낼만한 끈기는 다소 부족했을 것도 같다.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있고 각자 적절한 속도가 있다고 한다. 특색 없는 시작이어도 어떤가. 마침 나에게도 달리기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찾아온 셈이다.
런데이 8주 프로그램에서 1주 차 첫째 날은 1분 달리기와 3분 걷기를 반복한다. 이 정도는 껌이지! 의외로 나약한 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나는 첫 번째 1분 달리기와 3분 걷기를 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쉬워 보인다고 무시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법. 두 번째 1분 달리기를 시작하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증상을 맞이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옆구리 통증.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고 몸이 앞으로 굽어지게 만드는,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강렬한 고통이었다. 걷다 보면 다시 안정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통증은 내내 계속되었다. 어떻게든 달려보려 했지만 더 이상 달리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나머지 훈련은 내내 걷다가 마무리하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전력질주를 한 것도 아닌데 1분도 제대로 달리지 못하다니! 아주 그냥 제대로 실망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달리기는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면서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의외로 나는 오기가 생겼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를 찾아보니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제법 성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쩌다 한 명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저 수많은 사람들이 해내는데 나라고 왜 못 하겠어. 선수할 것도 아니고 그냥 건강을 위한 달리기일 뿐인데! 훗날 스탬프가 가득 찍힌 화면을 캡처해서 보란 듯이 자랑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얼마나 짜릿할까.
그래서 둘째 날도 달렸다. 여전히 옆구리는 아팠지만 달리는 동안 호흡에 익숙해지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에는 내 성질이 급했다. 네가 아프든 말든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처절하게 달렸다. 횡격막은 알아서 적응하도록 하렴.
다행스럽게 2주 차부터 더 이상의 통증은 없었고 점차 걷는 시간보다 달리는 시간이 늘었다. 분명 발은 느린데 왜 숨이 차는지. 이러다 심장이 터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든 순간도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 너무 힘든데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런저씨(난 그 당시 런총각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부터 스스로를 런저씨라고 칭하더라)가 ‘이제 걷기를 시작합니다’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기다리면서.
하지만 절대 못해먹겠다고 포기는 하지 않았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이 훈련을 다시 해야 하는 게 싫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 하기 싫은 게 당연한 법. 내가 달리기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완벽주의를 버리고 단순해져야 뭐라도 한다는 거다. 그래서 계속 달렸고, 땀을 흘릴 때마다 오늘도 해냈다는 성취감이 쌓였다.
단순히 소셜미디어에 인증하려는 목적으로만 달렸다면 런데이 8주 프로그램이 끝나고 얼마 못 가 그만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순수하게 자랑 목적으로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24회를 달리는 게 가능할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분도 보통 의지는 아닐 것 같다.
꾸준히 달리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야외 달리기를 할 때는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부상방지 차원에서 워밍업 운동도 해야 하고 날씨가 어떻든 바깥으로 나가야 하고 다녀오면 쿨다운 스트레칭도 해줘야 하고 녹초가 되더라도 땀을 흘렸으니까 샤워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달리고 있다. 중요한 건 페이스든 거리든 자세든 나만 아는 미세한 변화일지라도 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꾸준하게 해내고 있다는 것. 거기서 오는 자부심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되었다.
소박하지만 4월이면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이 된다. 오래 지속하는 취미를 가지고 싶다. 그게 달리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달리기를 하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과 생각은 자연스럽게 글의 형태가 되었고 나는 이 과정에서 달리기를 더 좋아하게 됐다. 올해도 열심히 달리고 싶은 마음에 달리기 1주년 기념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부족한 글이어도 누군가에게는 기분 좋게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단 써본다.
하니까 되더라. 그러니까 일단 하자. 내가 달리기에서 배운 제일 중요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