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달려본 소회
사람마다 매년 사계절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시간의 흐름을 되돌려 보면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의 큼직한 프로젝트나 사건사고로 기억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행, 공연 같은 이벤트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혹은 친구나 연인과의 소소한 추억이 남을 수도 있을 거다.
나는 초보 러너답게 사계절을 달리기로 가득 채웠다. 야외에서 달리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하늘은 시간대에 따라서, 나무는 계절의 흐름에 맞춰서 금세 달라진다. 자칫하면 놓치고 지나가기 쉬운, 소소하지만 귀여운 장면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다. 하천에서 유유히 돌아다니는 청둥오리들, 풀밭에서 멍 때리고 있는 고양이, 우두커니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꼭 그곳을 지나가야만,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소중한 장면이다. 그렇게 달리면서 마주한 장면들이 모여서 한 계절을 기억하고 한 해를 장식하는 추억이 되었다.
봄은 누구나 예상하듯이 어딜 가도 아름답다. 특히 4월에는 벚꽃이 만발한 데다가 햇살이 따사로워서 달리기에 완벽한 날씨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웬만한 그림보다 아름다워서 절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어떻게든 인증샷으로 남기고 싶어서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 들지만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로 정확하게 구현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매번 안타깝다.
여름은 어항의 계절이다. 말 그대로 어항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미친듯한 습도를 자랑하는 한국의 여름을 표현하기에 찰떡인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달리기 제일 힘든 계절이다. 여러모로 걸림돌이 많다.
여름은 덥다. 웬만하면 해가 없을 때 달려야 한다. 그런데 여름은 해가 제일 긴 시기이다. 어떻게든 밖에서 달리고 싶다면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주로 저녁 9시 이후에 나가서 달렸는데 막상 달려보니 썩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열대야에는 늦은 밤에 나가도 소용이 없었다.
여름 달리기에서 유일하게 좋은 기억이 하나 있다면, 폭우가 지나간 다음날 들리는 하천의 물 흐르는 소리다. 마치 계곡에 온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우렁차다. 하천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면 체감온도가 내려가는 효과가 있었던 걸까. 온 동네 사람들이 산책을 하러 나왔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매일 같이 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게다가 어두운 밤에는 발 밑이 잘 보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땅을 잘못 디딜 것 같은 불안함, 어제만 해도 불이 잘 들어왔던 가로등이 오늘은 꺼져있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땀, 축축한 공기. 제일 성가신 것은 달리면서 숨 쉬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습기 한 덩이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는 것 같은 느낌. 차라리 비가 내리면 시원해지기라도 하지. 비 오는 날에 일부러 나가서 달릴 정도로 우중주를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달리는 중에 비가 내리면 흔쾌히 반길 수 있을 정도의 재미는 경험했다.
그렇게 힘든 여름을 보내다가 더위가 한풀 꺾이면 숨쉬기가 수월해지고 그때는 다시 달리기 좋은 가을이 된다. 선선함을 넘어 쌀쌀해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서서히 단풍이 들면서 온 세상이 알록달록 해지고 한동안 눈도 호강한다. 그래도 봄과는 느낌이 다르다. 곧 겨울이 온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체감상 사계절 중 가을이 제일 짧게 느껴지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겨울은 막상 달려보니 생각보다 달리기에 나쁘지 않은 계절이었다. 일단 사람이 적다는 게 제일 큰 장점이다. 주말의 이른 아침에는 마치 길을 전세 낸 것처럼 사람이 거의 안 보일 때도 있다. 거센 바람에 대비해서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준비 운동을 좀 더 길게 하는 건 귀찮고 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쓸쓸한 겨울에도 꽤 볼 만한 게 있다.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고 온 세상이 하얘지면 저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텅 빈 풍경 속 내가 달리고 있는 길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나의 규칙적인 발 구름과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고 내쉬는 동안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추운 겨울에 달려야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이다. 눈길을 뽀득뽀득 밟으면서 달리는 기분도 좋다. 물론 미끄러질까 봐 평소보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서 더 피곤한 건 약간의 단점으로 남겨두자.
어느새 꽁꽁 얼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햇살이 따뜻한 기운을 내뿜고, 아플 정도로 매서웠던 바람은 조금씩 온순해지는 게 느껴진다. 다시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겨울이 굉장히 길다고 생각했을 텐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계절을 마주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겨울이 후딱 지나버렸다.
올해는 또 어떤 사계절을 기억하게 될까. 아마 달리기로 1년을 돌아본 만큼 올해는 만반의 준비를 해서 좋은 면만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좋았던 계절의 단점을 마주할 수도, 싫었던 계절의 장점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미세먼지는 이제 계절도 타지 않는지 걸핏하면 나쁨 상태인게 속상할 따름이지만, 어찌 됐든 나에게는 계절을 체감하고 한 해를 기억하는 방법이 하나 더 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