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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Nov 04. 2023

김포반도 154고지 애기봉



1.


구글 지도가 보여주는 한반도 모습은 심플하다. 남과 북의 구분만 있을 뿐 지극히 평화롭다. 개성과 인천을 타깃 삼아 그 사이를 확대해보면 차이가 드러난다. 여전히 단조로운 북녘과 달리 남쪽의 산하와 대지는 한껏 오밀조밀해진다. 누군가 무심코 그어놓은 듯한 곡선 하나가 낙서처럼 거슬리지만, 가느다란 그 선을 사이에 두고 우리 땅 강화도와 김포반도와 파주 일대가 북녘땅 개풍군과 마주보고 있다. 이들 4개 지역 사이로 끼어든 몇 갈래 푸른 물길들은 결국은 큰 바다 서해로 모아지며 하나되는 모양새다.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흘러온 임진강은 파주 오두산 앞에서 더 큰 물줄기인 한강으로 섞인다. 두 강이 만나는 이곳 두물머리부터 김포반도 지나 강화 초입까지 이어지는 한강의 하류 구간을 옛사람들은 ‘할아버지처럼 넓은 강’이란 의미를 담아 ‘조강(祖江)’이라 불렀다. 개경과 한양 사이에서 남과 북의 사람들이 교역하고 소통했던 한반도 중심 물길이었다. 그런 조강 물길을 사이에 두고 북녘땅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위치에 애기봉이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를 가르는 155마일 군사분계선, 그 남쪽으로는 두 개의 곡선이 더 존재한다. 폭 2km의 비무장지대를 가르는 남방한계선과 더 남쪽으로 그어놓은 민간인 통제선, 소위 민통선이다. 강원과 경기가 동서를 나누며 거의 절반씩 이 지역을 공유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민통선과 남방한계선 그리고 군사분계선 너머까지 수 킬로미터 시야를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들 3개의 비정한 경계선을 무력화시키면서 북녘땅 사람 사는 모습들을 강 건너 동네 구경하듯 정겹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김포반도 북단 중앙에 위치한 애기봉이다.      



2. 


1996년 7월 한반도 중부지역 임진강 일대엔 대홍수가 있었다. 하늘 천정이 뚫린 3일간의 집중폭우 때문이었고, 수많은 인명 손실과 재산 피해를 불러왔다. 10년 전 태풍 셀마 이후 최대의 수해 참사였다. 당시 북녘땅 어딘가에서 조난돼 강물에 떠밀려오던 황소 한 마리는 한강 하류 외딴섬에 올라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는 잠시, 남북한 첨예한 접경지대에 속한 무인도는 지뢰에 발목 부상까지 당한 황소가 살아갈 만한 환경이 못 되었다. 


먹을 것 없이 굶주리며 그해 여름과 가을을 버텨내고 겨울 혹한 속에서 죽어가던 황소는 5개월을 넘긴 1997년 1월에 DMZ 경비망에 포착되었고, 이어진 김포시청과 해병대의 전격 구출작전에 따라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대한민국 품에서 안정을 찾은 1년 후 황소는 따뜻한 민간의 주선으로 제주도 우도(牛島)에서 올라온 암소 한 마리와 짝을 맺었고 이후 7년 동안 매년 송아지 한 마리씩을 낳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리곤 2006년 5월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황소의 유해는 화장되어 유골함에 담겼고 지금까지도 납골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사람들은 황소 생전에 한반도 미래의 염원을 담아 ‘평화의 소’란 이름을 붙여줬고, 제주 출신 신부 암소에겐 ‘통일 염원의 소’란 이름을 달아줬다. 둘이 낳은 일곱 마리의 송아지들은 제주도 등 각지로 분양되어 가축으로서의 삶을 이어갔고, 2021년 신축년 소의 해에는 제주도 등 여러 곳에서 ‘평화의 소’ 6대손 송아지까지 그 존재가 확인된 바 있다. 


황소가 구조된 섬 유도(留島)는 김포 북서해안 보구곶에서 400m 떨어진 작은 섬이지만, 군사분계선에서 700m 위치의 한강 비무장지대에 속한다. 옛날엔 거주민도 있었다지만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떠나보내고 남북한 공동 이용 수역에서 홀로 둥둥 떠다니는 외로운 모양새다. 이런 유도의 모습을 바라보며 27년 전 어느 날 북녘땅 황소 한 마리가 홍수에 떠밀려오는 모습을 눈앞에서 상상해 그려볼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김포시 월곶면 조강 기슭의 애기봉이다. 6.25 직후 강을 건너 밀고 내려온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154고지였고, 지금은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1-3번지에 속하는, 해발 154m의 야트막한 봉우리다.      



3.


애기봉에선 정전 이후 거의 매년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때마다 실향민들이 모여 북녘을 향한 거대 등탑에 불을 밝혀 왔지만, 2004년 남북 간 화해 무드에 따라 애기봉 등탑 점등 행사는 중단된 바 있다. 이후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6년 만에 등탑 점등이 재개되며 남북 긴장이 고조되다가 2014년 말에는 등탑이 완전 철거되는 등 애기봉은 분단 한반도의 긴장 수준을 제일 먼저 감지해온 곳이다. 


그런 최전방 역사의 현장이 지금은 말끔한 안보 공원으로 새 단장하여 북녘땅을 바라보려는 수많은 이들의 발길을 맞아들이고 있다. 1978년부터 원래 있어왔던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등 5년 가까운 공사 기간을 거쳐 2021년 9월에 ‘애기봉평화생태공원’으로 오픈한 결과다. 강 하나 건너 북녘땅과의 거리가 고작 1.4km에 지나지 않는다. 마포대교를 사이에 두고 여의도와 마포가 마주보는 형국이다. 


155마일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km를 잇는 남방한계선과 비무장지대(DMZ) 그리고 10km 내외의 민간인 통제선, 이들 접경지는 파주 서단의 임진강 하구부터 시작되는 육상 구역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김포반도와 강화도 앞바다의 해상 구역은 ‘한강하구 중립 수역’으로 통한다. 


강원도 고성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DMZ와 민통선 일대에서 일반인이 복잡한 절차 없이 휴전선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는 강화 평화전망대와 고성 통일전망대 등 몇 군데 되지만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접경지는 애기봉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북녘땅은 적나라하고 현실적이다. 


애기봉 방문에는 인터넷 사전 예약(www.aegibong.or.kr)이 필수다. 입구 검문소에서 예약 여부와 신원을 확인 후 1.5km를 더 들어가면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이다. 도보는 불가하고 차량 이동만 가능하다. 기다란 흔들다리를 건너 애기봉 전망대인 ‘루프탑154’에 오르자마자 바로 눈 앞에 펼쳐진 북녘땅과 마주한다. 개성과의 직선거리가 20여km에 불과한 위치다. 


멀리 보이는 송악산이 오래된 벗처럼 친근해 보이고, 그 앞으로 개풍군 일대 야산들 그리고 바로 코앞에는 선전마을 농경지와 다가구 주택들이 이웃 동네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인다.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보면 북한군 초병들이 서로 잡담하는 모습까지 생생하다. 바로 밑을 흐르는 조강은 썰물 때면 군데군데 드러난 갯벌 바닥 때문에 너무도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을 듯 보인다. 


‘어린 아기’와는 관계없는 지명이다. 그 옛날 병자호란 때 피난길에 올랐던 평안감사가 청나라 오랑캐에 붙잡혀 북으로 끌려간 후 혼자 겨우 강을 건너온 그의 기녀 애첩이 매일 이 봉우리에 올라 북쪽으로 잡혀간 님을 그리워하다 죽었다는 설화에서 ‘애기(愛妓)’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 애기봉 발 아래 유유히 흐르는 조강의 서쪽 끄트머리쯤에 북녘 황소 한 마리가 머물다 구조된 무인섬 유도가 자리잡고 있다. 애기봉에 서면 정면의 북녘땅 개풍군 일대 모습들이 우선 관심 대상이기에 변두리의 유도는 망망대해처럼 느껴지는 왼쪽으로 일부러 눈을 돌려야지만 시야에 닿는다. 


애기봉 동쪽으로 임진강이 한강 품에 안기는 두물머리에서, 서쪽으로 강화해협 초입의 섬 유도까지 10여km 이어지는 조강은 곧이어 개경 또는 개성에서 내려온 예성강 물을 받아들이며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오랜 옛날 이 물줄기를 따라 나룻배 탄 사람들이 남과 북 구분 없이 오가는 정경을 지켜봤을 애기봉은 25년 전 북녘의 황소 한 마리가 남쪽 품에 안기는 과정도 또렷이 기억할 것이지만, 지금은 온갖 철새들이 남과 북을 넘나드는 모습들만 안타까이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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