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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Nov 29. 2023

대영박물관에서 (2/2)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문화를 얼마나 접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이 궁색해질 것이다. 영국의 문화가 아닌, 강국일 때 영국의 힘이 끌어모은 세계의 문화유적들이다. '브리티시 뮤지엄 British Museum'은 어찌 보면 '영국박물관'이라고 축소해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영제국 시대의 유물들을 모아놨다는 의미에서는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이란고원에 나타난 인류의 조상은 오래 세월에 걸쳐 더 살기 편한 땅을 찾아 조금씩 이동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먹거리를 구하기가 쉬웠다. 이곳으로 스멀스멀 몰려든 원시인들은 먹고사는 방식을 차츰 개선시켜 나갔고, 기원전 1만 년부터는 나름의 혁신을 이루며 소위 신석기시대란 걸 열었다.      


이들은 핏줄끼리 점차 종족을 이뤄나갔다. 그중에서도 수메르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들이 도드라졌는가 보다. BC 4,000년을 지나면서 보니 이곳 메소포타미아에는 특히 수메르인들이 잘 먹고 잘 살며 인류 최초의 ‘문명’ 이란걸 꽃 피우고 있었다. BC 1,000년쯤 되자 종족 간 영역 다툼의 싸움도 그 규모가 커졌다.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아시리아는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싸워 이기고, 서쪽의 이스라엘까지 흡수시키며 중근동 일대를 통일했다.      


이후 아시리아가 쇠퇴해지자 바빌로니아가 잠시 부흥하더니, 동쪽에서 일어난 페르시아 왕국이 오리엔트 세상을 재패했다. BC 500년 경이다. 페르시아는 기세등등하게 서쪽으로 그리스까지 밀고 들어왔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와 살리미스 해전 등을 통해 동방인 페르시아는 서방세계에 참패하고 물러났다.      


얼마 후 역사는 반전되었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오리엔트로 뻗어나가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이후의 세계역사는 오리엔트와 그리스가 융합되는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대로마제국의 시대로 들어섰다.      



대영박물관에서 아시리아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집트나 그리스로마관에 비해서 적지 않다. 6, 7, 8, 9, 10관까지 다섯 개의 공간에 넓게 걸쳐 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주역으로서의 아시리아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시리아 왕국의 최고 전성기는 기원전 9세기 중반 아슈르나시르팔 Ashurnasirpal 2세 때였다. 그는 지금의 이라크 북부에 해당하는 님루드 Nimrud로 수도를 옮겨 새 궁전을 지었고, 왕의 힘과 위대함을 과시하는 수많은 조각과 부조들을 남겼다. 대영박물관 아시리아관의 전시물들에는 왕의 석고 부조를 포함하여, 님루드의 궁전을 장식하던 유물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전시실 벽면에 줄지은, 전쟁과 사냥 또는 행렬이나 의전에 관한 부조물들은 활동사진을 보는 듯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말이 끄는 전차 위에서 사냥감을 향해 활을 쏘는 모습,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어부, 농사와 목축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한 부조, 군대의 행렬과 위용을 과시하는 장면 등이 이어진다. 특히 사자를 조연으로 삼고 왕이 주연을 맡은 작품들이 유독 눈에 띈다. 위대한 아슈르나시르팔왕이 달려드는 사자와 태연하게 맞서 싸우고 있다. 왼손은 사자 목덜미를 막아 쥐고 오른손 칼로는 사자의 심장을 찌르는 모습은 참으로 장쾌하다. 울부짖는 사자들의 포효가 전시관을 가득 메우는 느낌이다.     

 

사자는 아시리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시리아관 입구에는 거대하고 독특한 모습의 사자상이 양쪽에 하나씩 서 있다. 머리는 인간이지만 몸통에는 독수리의 날개가 달린 반인반수의 형상이다. 정면에서 보면 꼿꼿하게 서 있는데 옆에서 보면 다리가 다섯에, 걸어가는 동작임을 알 수 있다. 악령으로부터 왕의 궁전을 보호해 준다는 수호상 라마수 Lamassu, 아시리아 민족의 수호신이다. 우리나라 시골에도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의 모습으로 마을 입구에 장승들이 서 있다. 경계 표시이기도 하면서 외부로부터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이다.      


라마수는 이곳 대영박물관 말고도, 파리 루브르나 미국과 독일의 박물관들에도 다수 옮겨져 있다고 한다. 중동 지역에도 여러 곳에 여전히 유물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지금의 이라크 북부 모슬 지역은 옛 아시리아의 수도 님루드 근처인 만큼 라마수 등 남아 있는 유적이 상당하다고 한다.      


8년 전인 2015년 봄에 국제적으로 이슈가 된 뉴스가 있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IS 세력이 그들의 점령지 이라크 북부 모슬 주변에서 고대의 유물들을 대량 파괴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라마수로 상징되는 중근동 고대의 토속 신앙이, 훨씬 이후에 시작된 이슬람 신앙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는 이유였던 모양이다.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 가는 우리 현대인들이 수천 년 인류 역사가 깃든 소중한 유물을, 너무도 허망하게 한 줌 흙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아시리아관 전시물들은 물론 중동 지역 현지에서 영국이 힘으로 강탈해 온 유적들이다. 그러나 이곳 박물관에 보관돼 있음으로 해서 인류역사의 고귀한 보물로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영국이 주장해 온 대영박물관 합리화 논리일 것이다. 앞으로도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들이 보존한다는 영국의 방침엔 변함이 없어 보인다.      


한 도시의 국립박물관에서 그 나라의 문화가 아닌, 과거의 약자 나라에서 강탈해 온 유물들만을 만난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중동 현지에서 IS세력이 자행하는 저런 파괴와 만행의 소식을 접하고 보면, 은근히 영국의 입장에 편들고 싶어 진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문화재 갈취가 만행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문화재들은 해당 지역의 소유물이긴 하지만 인류 공동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보물들이 이곳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보면, 지금의 대영박물관의 가치가 새삼 돋보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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