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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Feb 17. 2024

일본 최고봉 후지산 탐방기 (上)


‘우키요에(浮世絵)’는 일본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 유행했던 화풍의 일종이다. ‘뜬세상,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우키요(浮世)’ 의미 그대로, 속세 사람들의 일상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를 일컫는다. 목판화 형태로 당시 서민 계층에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일본이 20년 만에 지폐 디자인을 바꾸는데 2024년 상반기에 선보일 1,000엔 신권 뒷면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우키요에 한 점이 실린다. 에도 말기의 목판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 ‘가나가와 오키나미 우라(神奈川沖浪裏)’이다. 제목을 직역하면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이지만 우리나라에선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림의 주인공이 파도가 아니고 후지산이기 때문에 적절한 의역이다. 후지산 풍광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사물들과 함께 담아낸 우키요에 연작 ‘후카쿠(富嶽) 36경’의 첫 번째 작품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미술계에 한동안 유행했던 일본풍 선호 현상 자포니즘(Japonism)의 중심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 등에 열광했던 반 고흐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모든 작품은 일본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새 시대가 열리기 얼마 전, 저물어가는 막부 시대의 사회 분위기가 이 그림 한 장에 잘 담겨 있다.


그림 속 거대한 파도는 당시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 문물인 듯하고, 파도에 이는 거품들은 입 벌린 야수의 이빨과도 같다. 그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두 척의 배는 몹시도 위태로워 보이지만, 배 위의 일본인들은 배의 흐름에 운명을 맡긴 체 그저 온몸을 바짝 엎드리고만 있다. 그러나 그림 중앙의 후지산은 작지만 의연하다. 지긋이 지켜볼 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일본인들의 버팀목처럼 굳건해 보인다. 



일본 최고봉 후지산은 혼슈(本州)의 주부(中部) 지방 남부에 위치한다. 야마나시현 남부와 시즈오카현 동북부에서 열도 전역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는 요시다(吉田), 스바시리(須走), 후지노미야(富士宮), 고텐바(御殿場), 이렇게 4개 루트가 있다. 요시다 루트만 야마나시현 쪽이고, 나머지 셋은 모두 시즈오카현에서 오른다. 넷 중 등산로와 하산로가 별개인 요시다 루트가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대중적이다. 때문에 산장과 휴게소 등 편의시설도 상대적으로 더 잘 구비되어 있는 편이다. 입산은 4개 루트 공히 7월 초부터 9월 초중반까지 매년 두 달 정도만 허용된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마다 버스 2~3대로 ‘DMZ 평화의 길’을 2년째 걷고 있는 (사) DMZ생태관광협회(회장 강석호) 회원 190명 중 9명이 선발되어 후지산 등반에 나섰다. 대개는 여행사 통한 1박 2일 패키지 여정이 일반적이지만, 협회는 자체 계획에 따라 중턱 산장에 숙박하지 않고 한 번에 오르는 당일치기 등반을 택했다. 

 

8월의 화창한 여름날, 요시다 루트 등산로 입구인 후지스바루라인(富士スバルライン) 종점에 도착했다. 도쿄 신주쿠역 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한 지 두 시간 반 만이다. 이곳 5 합목(五合目)은 후지산 기슭에서 정상까지 높이를 10 등분한 중간쯤인 5부 능선, 해발 2,305m 지점이다. 6, 7, 8, 9 합목 거쳐 최종 10 합목까지 오르면 후지산 분화구에 이르고, 마지막 단계인 분화구 둘레 한 바퀴를 돌면 해발 3,776m의 정상에 서게 된다.  


왕복 총 거리 17km(요시다 루트 14km+분화구 둘레길 3km)에 12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5 합목 주변에 예약된 산장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등반을 시작했다.  


요시다 루트가 늘 붐빈다고 들었지만 새벽 산길엔 인적이 드물었다. 평일인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늘 정상에 오를 등반객들 대부분은 어제 오후 출발해 산 중턱 산장에 투숙했을 것이니 지금쯤은 새벽 일출을 정상에서 맞기 위해 부지런히 오르고 있을 터이다.  


일렬로 나아가는 우리 일행 아홉은 각자 거친 숨만 몰아내며 한 발 한 발 내디딜 뿐 말들이 없다. 어지러이 교차하는 헤드 랜턴 불빛들이 ‘초반부터 만만치가 않구나’ 하는 모두의 느낌을 대변하는 듯하다.  


7 합목 해발 2,700m를 넘어서자 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 만나는 산장 하나고야(花小屋) 앞에서 잠시 한숨 돌리며 주변을 내려다봤다. 어둠에 묻혔던 세상의 모습들이 희미하나마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수목한계선은 지나는 줄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이미 지나쳐왔는지, 발아래로 숲과 나무의 모습들은 보이지 않는다. 해발고도가 백두산 천지 2,744m와 같은 높이인 만큼 나무와 숲 따위가 보일 리 없다. 


이어서 만나는 산장들 히노데칸(日の出館)과 토모에칸(トモエ館)을 뒤로하고 새벽 5시 15분, 해발 2,800m 카마이와칸(鎌岩館) 앞에서 일출을 맞았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저 장엄했다. 지상 세계를 뒤덮은 하얀 구름들 위로 검붉은 불덩이가 속도감 있게 솟아오른다. 일출과 함께 후지산 앞 세상은 한순간에 양분되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한 줄 운평선(雲平線)을 중심으로 그 아래는 솜털구름 세상이요, 그 위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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