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 공허로부터의 환희

마크 로스코 - 내면으로부터를 읽었다

by 마나스타나스

몇 달 전 우연히 보게 된 마크 로스코의 No. 14 색면 추상 앞에서, 나는 뜻밖에도 쥐스킨트의 소설 『깊이에의 강요』를 떠올렸다. 깊고 깊음을 추구하다 세상을 떠난 예술가, 그리고 깊이를 잃은 예술가— 한순간 겹쳐졌던 그때의 인상을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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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 - 내면으로부터』는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퍼 로스코가 쓴 책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의 생애를 되짚는다. 마크 로스코는 크리스토퍼가 6살이 되던 해 자살했다.


모든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하나의 흐름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예술 사조는 문학과 미술, 음악을 넘나들며 동시대의 감각을 공유한다. 언어와 형식이 달라도, 이들은 불안, 희망, 고독 같은 보편적 정서를 공감각적으로 환기시키며, 궁극적으로 시대를 초월한 위안을 전한다.


20세기, 전쟁과 폭력 속에 세계는 균열되고, 사람들은 파편화된 인간 본성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예술 또한 해체와 전환의 시간을 맞으며, 전통적 질서를 해체하며 내면의 감정과 감각을 표현하려는 실험적 표현의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그 지점에서, 구체적 대상을 생략하고 형태와 색의 조합으로 감정과 생각의 본질을 탐색한 추상미술이 등장한다.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칸딘스키는 색과 형상의 무질서 속에서, 그리고 몬드리안은 질서와 조화 안에서 감정을 시각화했다. 방식은 달랐지만, 이들은 감정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다는 점에서 같은 목표를 향했다. 이들은 이후 패션과 건축에도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의 그림에서 전하고자 했던, 형상화한 내면의 감정은 내게는 개념적으로만 느껴졌다.


반면 잭슨 폴록,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를 비롯한 후기 추상화가들의 작업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들의 그림은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정하지만, 직관적이며 폭발적인 힘으로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로스코는 추상이야말로 인간 경험의 구체적인 부분과 같이 묘사하거나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가장 잘 포착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추상은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동시에 감정적이고 영적인 것까지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음악은 의식적 사고보다 앞선 감정적 층위로 곧바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준다. 로스코는 추상을 통해 음악이 곧장 도달하는 이러한 영역에, 다양한 감각 영역이나 사유의 방식으로 분리될 수 없는 인간 전체를 다를 수 있는 영역에 다가가려 했다.

로스코는 일반적으로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분류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스코가 기존 추상화의 분류에 온전히 수렴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역시 그 범주화를 경계했으나, 추상표현주의가 로스코의 작업에서 핵심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두 가지—"지적이고 객관적인 현실 표현과 인간 본연의 감정과의 접촉"—를 정확히 포착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로스코는 고전음악을 좋아했다. 추상화가들이 당대 음악에서 받은 인상을 시각 예술로 전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로스코의 기호는 특별하게 보일 수 있다. 로스코에게 예술은 시대를 초월하는 영속적인 것이자,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종종 고전음악을 들려주었던 로스코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했고,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어린 아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가 모차르트를 좋아했던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모차르트가 항상 - 눈물을 흘리며 웃기- 때문에 그를 이해한다"


그런 모차르트의 정서는 로스코의 예술 세계와 닮아 있다. "눈물을 흘리며 웃는다"는 이중 감정은 그의 예술 세계를 상징적으로 요약한다.


절대적으로 공허한 로스코의 그림 속을 응시할수록 깊은 절망과 불안 너머의 뜻밖의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뜻밖의 설명할 수 없는 정서적 해소, 혹은 해방감에 가까운 감정의 체험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 기법에서 기인한다는 게 아들인 크리스토퍼의 해석이다.


마크 로스코는 감정의 다양한 층위를 겹쳐진 붓질과 색의 중첩을 통해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특정한 색의 사용에 의미를 담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과 구성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경험이었으며, 이를 캔버스의 크기 확장으로 구현했다. 점점 커진 화면은 관객을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 되었고, 로스코의 그림은 감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경험’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로 생겨나는 감정의 해소, 어떤 경우에는 카타르시스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 감정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그의 색면회화는 채도 높은 어두운 색의 심연을 지나, 건강이 악화된 60년대에 이르러서는 명도 높은 밝은 색의 공허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크리스토퍼는 “솜털 같은 구름이 언뜻 보이는 모서리를 지닌 이 광활한 분홍색 영역에 과연 공허가 없을까?”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로스코가 덧입힌 색의 심연 속에는 언제나 공허가 함께한다. 바로 그 공허 덕분에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자신의 감정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색으로 규정되길 거부했던 로스코가 정작 그림의 크기와 그것을 둘러싼 직사각형 틀에는 극도로 예민했다는 것이다. 화면 바깥 선의 처리, 액자의 마감, 그리고 크기까지 그는 철저히 통제했다. 공허를 그려내던 로스코는 동시에 ‘형태’라는 제한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을 그의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점점 커지거나 또는 축소되어 가는 직사각형의 색면들은, 형태라는 테두리 안에서 인간이 느끼는, 혹은 인간이기에 느껴야만 하는 보편적 감정을 직면하게 하는 장치인 셈이다.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아버지의 작품을 그의 전기를 통해 해석하려는 시도에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마크 로스코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 세계를 단순한 비극적 서사로 읽게 만드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그림에 스민 우울과 슬픔, 그 한켠의 비극적 환희가 곧 작가의 우울한 성정이나, 그 성정을 빚은 삶의 궤적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크리스토퍼의 주장이다.


물론 삶과 예술은 단절되지 않는다. 로스코는 열 살까지 라트비아에서 유대인 소년으로 자랐고, 이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성을 바꾸었으며, 유대교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라트비아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전쟁 속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민족의 역사, 전후 소련 지배 아래 언어를 잃어야 했던 조국 사람들—로스코는 그들을 찾지 않았지만, 어쩌면 마음 한편에서는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전쟁과 이민, 정체성의 해체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하지만 크리스토퍼의 말처럼, 로스코의 그림을 단지 작가의 삶과 감정의 산물로만 해석해서는 그의 예술이 지닌 보편성을 놓치게 된다. 로스코가 추구한 것은 개인의 절망이 아니라, ‘순수한 허무’ 속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비극적 감동이었다. 그의 작품은 삶의 고통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깊은 층위에 머무르며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즈음, 고명도와 저채도의 청회색과 회보라색 직사각형 두 개로 이루어진 로스코의 색면회화 한 점이 삽입되어 있다. 수채화로 그려졌으며, 음영의 차이를 통해 미세한 깊이감이 드러난다. 1969년, 무제 Untitled라는 제목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숨이 잠시 멎었다. 로스코는 생전 수많은 작품에 무제 Untitled라는 이름 아닌 이름을 붙였다. 색으로 규정되길 거부한 그는,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길 바랐다. 제목을 부여받지 않은 캔버스 앞에서 숨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는 일—그것이 로스코가 원했던 경험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감정을 구축했다. 그의 앞에 선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무제’의 입장으로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Mark Rothko, Untitled, 1969 acrylic on paper mounted on canvas 53 3/4 × 42 1/2 © 2024 Kate Rothko-Prizel and Christoper Rothko/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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