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관한 기억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2008

by 달리

앤드루 포터의 단편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기억을 다룬 이야기들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열 개의 단편이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쓰인 것은 아마 작가가 그것이 기억이란 소재의 질감을 살리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멍」은 열한 살 때의 일을 기억하는 스물세 살 남성의 시점으로 쓰였고, 「코요테」는 열세 살 때의 일을 기억하는 서른세 살 남성의 시점으로 쓰였다.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대학 학부생 시절에 맺은 한 인연을 1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회상하는 여성의 시점을 취했고, 「외출」은 열여섯 살의 봄부터 여름이 저물어갈 무렵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는 스물아홉 살 남성의 시점을 취했다. 이 소설집에 실린 가장 짧은 작품인 「피부」를 제외하면 모든 작품이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유사한 톤을 지닌다. 「피부」는 어느 부부의 결혼 후 6개월에 걸쳐 일어났던 일들을 결혼 직후의 과거 시점에서 마치 미래를 회상하듯 서술하는, 다분히 모순적인-그래서 더 매력적인- 관점을 취한다. 덕분에 독자는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들도 낯설게 마주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어떤 기억은 선명하고, 다른 기억은 흐릿하다. 어떤 장면은 일이 일어난 즉시 자아에 또렷이 각인되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 주변을 배회하던 수많은 기억들은 즉각 소거되거나 길고 짧은 시간의 흐름에서 하나둘씩 탈락한다. 무언가를 다른 것보다 더 많이,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그 밖의 것들을 덜 기억하거나 생략하는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경험된 세계의 객관적 실재는 실존하는 자아의 그다지 정교하지 못한 주관에 의해 변질되거나 사라진다. 즉 우리는 원체험을 기억하기보다 기억을 기억한다. 이것이 기억의 본질이다.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기억의 속성을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파고든다.


앤드루 포터는 미숙하고 불분명한 감정으로 지나치게 격앙되어 있던 시기의 기억들을 능숙한 솜씨로 끄집어 올린다. 모든 것이 충족된 행복한 기억보다 어딘가 불안한 기억들을 들추어냄으로써 기억의 불완전성이란 주제에 근원적으로 다가간다. 항상 오해와 이견의 여지를 남겨두는 그의 서술방식은 흐릿한 기억을 추적하는 스토리텔링과 절묘하게 맞닿으며 궁금증을 더한다. 그리고 그 궁금증이 절정에 이를 때쯤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기억에 얽힌 사연은 해소된 듯 보이지만, 모든 궁금증을 씻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구조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설정해둔 독자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현재 일어나는 사건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기억 속 이야기를 재생하고 재구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는 화자가 기억하는 만큼만 볼 수 있다. 나머지는 상상의 영역에 남겨져있다. 궁금증은 해소되기도 하고, 해소되지 않기도 한다. 그건 결국 우리 자신의 기억과도 긴밀히 연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억이라는 영상 예술의 연출가이므로.


당연하게도 소설 속 주인공들의 기억은 불분명하다. 때문에 형식논리적으로 당연한 사실마저도 자아가 매 순간 기억하는 이미지에 의해 임의적으로 편집된다. 나는 나의 가장 빛나던 순간과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이 스쳐가던 시간과 차라리 내가 아니길 바랐을 정도로 추잡한 모습의 혼종이다. 망각되지 않은 기억의 혼종. 나는 그 모든 기억의 주인이자, 어쩌면 기억 그 자체일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먼 미래의 나를 잇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 육체의 물리적 속성이 아닌 상호 주관적 기억에 있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의식적으로 막거나 조절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맥락에서 기억은 명백히 존재에 선행한다. 소설은 담담한 어조로 자신과 타인의 기억을, 그럼으로써 그 존재를 어루만진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영역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내놓은 학계의 설명은 물론 믿을만하지만, 바래진 기억을 어루만지는 데에는 그리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소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시피 했던 그 은밀하고 내적인 경험들을 서술함에 있어 뇌가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방식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의 표제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물리학 교수 로버트에 대한 주인공 헤더의 기억은 그들의 관계를 매개했던 물리학 이론처럼 단단하고 체계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언제나 그렇다. 이론은 너무 견고하고, 그렇기에 삶의 호소력을 잃는다. 우리는 그저 매 순간 타인의 기억을 살피고 뒤적이다 나와 비슷한 기억의 편린들을 주워 담고는 작게나마 위로를 얻을 뿐이다. 어쩌면 그게, 삶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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