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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25. 2020

선택과 책임의 무게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창비, 2009

* 쪽수: 252쪽



기발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장도 매우 지적이죠. 이야기는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초현실적인 공간을 핵심장치로 설정함으로써 초반부터 흥미로운 서사를 이어나갑니다. 독해력이 어느 정도 받쳐준다면 어린이에게 이보다 더 재미있는 책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흡인력 있는 작품이죠. 최근 한국에서 SF소설의 약진이 주목받고 있는데, 그 흐름에서 제 몫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 구병모 작가의 대중적인 데뷔작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주인공 소년의 1인칭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과 과거 사건에 대한 회상으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소년은 가족, 특히 새어머니인 배 선생으로부터 달아나 동네의 빵집 '위저드 베이커리'에 숨어 지내고 있죠. 이 빵집의 점장은 마법사입니다. 평범한 빵집인 줄 알았던 위저드 베이커리는 마법사가 신비한 효력을 지닌 빵과 쿠키를 만들어 파는 곳이죠. 가출한 소년은 위저드 베이커리의 홈페이지를 관리하며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기로 합니다.


소년이 위저드 베이커리에 머무는 동안 경험하는 일은 사뭇 의미심장합니다. 한 여고생은 먹으면 저주 효과가 생기는 쿠키를 사서 평소 싫어하던 친구에게 선물하죠. 친구는 그 날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며칠 뒤에 자살합니다. 예상치 못한 친구의 죽음에 놀란 여고생은 점장을 찾아와 그의 마법으로 자신의 행동을 되돌리려 하지만 점장은 오히려 무책임한 여고생에게 악몽의 저주를 겁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쿠키를 사용한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남자에 대한 사랑이 다한 여자가 이번엔 그를 떼어내기 위해 그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부두 인형을 주문하려고 하지만 점장은 거절합니다. 며칠 후 다시 찾아오겠다던 여자는 그날 밤 남자가 저지른 방화에 전신 2도 화상을 입고 말죠. 작가는 왜 이렇게까지 어두운 전개를 택한 걸까요.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118쪽)


목적을 이루려면 그에 맞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합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손쉬운 해결 방안을 찾아 헤매죠. 현실에서 그런 방안이 존재하기는 어렵겠지만 작가는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만들어내는 빵과 쿠키를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해진 상황을 토대로 일종의 사고 실험을 진행합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가벼운 선택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결국 대가 없는 선택이나 책임을 피할 수 있는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이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핵심 메시지죠.


한편 소년의 기억 속 몇몇 장면들을 회상하는 가운데 소개되는 어두운 가정사 역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6살 때 겪은 부모님 사이의 불화, 어머니와 단둘이 외출했다가 용산역에서 버림받은 기억, 어머니의 자살, 10살 때 아버지의 재혼으로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된 배 선생과 그녀의 어린 딸 무희, 무희가 성추행 가해자로 자신을 지목해서 쫓겨나기까지. 이 모든 일은 물론 불행하기 그지없으나, 현실에서 가족의 외피를 두르고 그 속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불행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이 모든 불행을 개인의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잔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앉아있을 수많은 없죠. 소년은 베이커리에서 얻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 무언가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이 끝까지 흥미로운 지점은 이야기의 결말이 갖는 함축성에 있습니다.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이만큼 도와줬으면 나머지는 주인공 소년의 몫으로 남겨두고 마무리지을 법도 한데, 이야기는 끝까지 선택과 책임의 문제를 상기시키죠. 점장은 집으로 향하는 소년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위험한 쿠키를 선물하고, 소년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 위험한 물건을 사용할 것인가, 사용한다면 시간을 어디로 되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하죠. 그리고 이 쿠키를 사용한 경우와 사용하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 결론을 맺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까지도 독자는 상상보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선택과 책임의 무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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