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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17. 2023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

이금이, 『유진과 유진』, 밤티, 2020

* 쪽수: 304



어린이·청소년 문학 분야의 고전 하면 어떤 작품이 떠오르시나요.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시대와 독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작품을 고전Classic이라고 했을 때, 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1865),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1876),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1900), 『빨강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1908),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Pippi Långstrump』(1945) 정도가 생각납니다. 물론 여기에 빠져선 안 되는 작품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리스트를 완성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니 이쯤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옛 작품의 일부를 고전으로 분류하거나 새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이러한 시도에서 종종 느껴지는 따분함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기준과 논리는 주로 '그 텍스트가 지금도 살아있는 의미를 지니는가'입니다. 작품이 어느 정도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개정판 출간이나 복간이 몇 번 되었으며, 미디어믹스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정량 분석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보다 본질적 층위에서 그 작품을 '지나간 한때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게 더욱 중요하지요. 뛰어난 작품은 시대가 바뀌어도 유의미한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이금이의 『유진과 유진』은 21세기 한국 청소년 소설 분야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2004년에 처음 출간됐고, 2020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아동 성범죄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회복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두 명의 '이유진'이 중학교 2학년 같은 반 친구로 등장합니다. 개성이 뚜렷한 두 아이는 각각 큰 유진과 작은 유진으로 구별됩니다. 이야기는 두 유진의 1인칭 시점에서 교차 서술되는 형식을 취합니다.


무겁고 강렬한 이야기입니다. 범죄의 피해 장면을 세부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현실 속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피해자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방식은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합니다. 두 유진은 어릴 적 같은 유치원에 다녔고, 그곳의 원장에게 성범죄 피해를 입었습니다. 큰 유진이 당시에 가족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랑해', '네 잘못이 아니야'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작은 유진이 가족에게 들었던 말은 '넌 아무 일도 없었어.'였고요. 그 뒤 작은 유진은 사건과 관련된 기억을 잃어버린 채 모범생으로 성장합니다.


몇 가지 디테일이 지금 청소년 독자의 현실과 어긋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유진과 유진』의 시대적 배경은 2000년대 초반 언저리의 한국입니다. 이곳은 '놀토'가 있고, PC 메신저 채팅에 익숙하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휴대폰을 갖지 못하는 게 그렇게 이상할 것까진 없는 세계입니다. 그 밖에도 3040 독자가 읽었을 때 아련하게 추억될 만한 디테일이 꽤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지금의 청소년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거란 뜻은 아닙니다. 이 작품에는 그런 부분적 이질감들을 전부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강하고 선명한 단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은유적 장치가 거의 쓰이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최초의 성범죄 피해, 그에 대한 본인과 주위 사람의 반응, 편견 어린 시선과 대응, 그로써 발생하는 2차 가해, 기억과 트라우마, 일탈과 회복, 그밖에 성폭력 피해의 중심부와 주변부에 혼재하는 모든 흐릿한 이미지의 윤곽이 두 유진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 정도의 정밀화가 그려지는 것이죠.


젠더 갈등의 차원에서도 진지한 고민거리를 안기는 작품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의 젠더 갈등은 날이 갈수록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 작은 유진이 겪어야 했던 모든 부당한 경험들은 그저 지나간 시절의 해프닝이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여성 피해자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는 바로 그 현실의 추악한 단면이지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러한 현실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 피해자 개인의 침묵과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아주 많은 문제를 은폐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만으로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는 비대칭적인 젠더 문화는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단호히 증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간지 《시사IN》에서 연재한 기획기사를 엮어 책으로 만든 『20대 남자』(2019)와 『20대 여자』(2022)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젠더 갈등 국면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주장들을 데이터에 기반하여 조목조목 짚으면서 현상을 지배하는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분석한 책입니다. 21세기도 어느덧 사반세기가 흘러가는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첨예한 이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젠더 갈등과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를 대폭 확장시켜 주는 좋은 책입니다.)


이렇듯 묵직한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이 이야기의 톤과 뉘앙스가 시종 어둡고 무겁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히 밝고 건강하고 역동적인 청소년의 이미지가 장면들을 일관되게 채워 넣고 있지요. 작가는 일어나선 안 되는 비극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내내 웃으며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드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감탄한 것 중의 하나는, 작가가 청소년의 언어와 정서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각이 매우 탁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섬세한 감각을 따라 울고 웃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두 유진과 함께 위로를 주고받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아파하는 자신과 타인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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