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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n 22. 2023

불의에 맞서는 이들에게 경의를

제리 크래프트, 『뉴 키드』, 보물창고, 2020

* 쪽수: 256쪽



오늘 소개할 작품은 제리 크래프트Jerry Craft의 『뉴 키드New Kid』입니다. 원작이 미국에서 발표된 연도는 2019년이고요. 그래픽 노블로서는 최초로 뉴베리 대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2020년에 그래픽 노블이 메이저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 자체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지요. 5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시시 벨Cece Bell의 『엘 데포El Deafo』(2014)라는 훌륭한 선례가 있기도 하고요. 어떤 작품이 ‘형식적으로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 ‘독자에게 어떤 문학적 체험을 제공하고 있는가’이고, 그 점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수 밥 딜런의 노랫말들만 보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지요.


『뉴 키드』는 인종, 계급주의, 편견과 차별, 폭력과 같은 주제를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2021년, 비판적 인종이론을 주입한다는 이유로 텍사스 주의 학교 도서관에서 퇴출된 특이한 이력이 있고요. 보수 성향의 도서관 금서 추진 세력이 주축이 되어 밀어붙인 일이었는데,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혀 금세 원상 복구되었다고 하지요. 뉴베리 수상작이라고 해서 비토의 대상이 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한심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저들은 2020년대 미국에서 제리 크래프트에 대한 보이콧이 성공하거나, 최소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진지하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한 사회였다면 애초에 뉴베리 메달을 걸 수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전략적 차원에서조차도 해볼 수가 없었던 거죠.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합니다.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조던 뱅크스’는 부모의 권유로 명문 사립인 리버데일 종합학교에 가게 됩니다. 조던이 정작 가고 싶었던 예술학교에 가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리버데일 재학생 대다수가 백인이라는 것도 조던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됩니다. 조던은 학교에서 몇 안 되는 유색인종 중 한 명이고, 이곳은 크고 작은 인종차별이 매일 같이 벌어지는 작고 폐쇄적인 세계입니다. 보통 이런 곳에서 주인공은 몇몇 악랄한 인종차별주의자와 적극적인 동조자,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을 만나게 되지요.


『뉴 키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별주의자는 '앤디'입니다. 일러스트에서 내내 빨간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건 아마도 도널드 트럼프를 연상시키기 위한 연출일 겁니다. 물론 작품 속 모든 인종차별이 앤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리버데일에선 학생뿐 아니라 교사도 종종 유색인종들의 이름을 틀리게 부르곤 하는데, 이로써 독자는 저들이 얼마나 차별에 둔감한지 알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차별주의자들이 자신이 차별을 행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자각도 없고, 그 때문에 정말로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리기도 하지요. 아마 이 책에 나오는 '롤리 선생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겁니다.


차별이 발생하는 양상은 생각보다 복잡해서, 똑같은 행위도 누가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차별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합니다. 『뉴 키드』는 그 점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지요. 조던의 흑인 친구 '드류'는 비밀 산타(마니또)로부터 농구공 쿠키와 KFC 상품권, 그리고 검은색 초콜릿 산타를 선물 받는데, 드류는 처음에 이것들을 악의적인 인종차별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비밀 산타는 분명 앤디일 거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드류의 비밀 산타는 '애슐리'였고, 선물들도 모두 사려 깊게 고른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오해가 풀립니다. 또 다른 유색인종 친구 '마우리'는 비밀 산타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쓴 베스트셀러를 선물로 받았는데, 정작 마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종차별이 성립하는 맥락이 결코 단순하지 않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피해의 정도도 저마다 다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들입니다.


한편 조던의 생활반경은 워싱턴 하이츠에서 리버데일을 오가는 뉴욕 어퍼웨스트사이드의 위쪽 지역입니다. 책에서는 '어퍼어퍼웨스트사이드'라고 익살스럽게 명명되지요. 조던이 통학을 위해 타는 버스 안 풍경은 이 지역의 독특한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분명 같은 버스 안인데도 워싱턴 하이츠의 조던과 리버데일의 조던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그려집니다. 튀지 않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워싱턴 하이츠에서는 후드와 선글라스를 쓴 채 터프하게 앉아 있어야 하지만, 리버데일에서 그러면 '매직으로 버스에 낙서를 하는 유색인종'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뉴 키드』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인종차별뿐 아니라 양극화, 문화적 편견과 같은 사회 이슈까지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의 결말은 화합과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학기 마지막 날 조던과 친구들은 작별 인사와 함께 각자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뭉클하고 애틋하지요. 그간 많은 갈등과 마찰이 있었고 일부는 심한 대립과 폭력적 상황으로까지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조던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많은 것을 느끼며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조던 개인으로서도 뜻깊은 결말이지만 유구한 차별의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 힘과 용기를 실어준다는 점에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또한 그것은 불의와 부조리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맞서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결말이기도 하지요. 저열한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윤리를 추구하는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품위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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