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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Jun 25. 2022

늘 똑같은 길을 걸으며

봄에는 산책 | 네 번째 이야기


우리 집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집에서 큰 대로변까지 나와서 그 길을 따라 쭉 걷다가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도서관에 도착하는 방법, 또 하나는 큰 대로변까지 나가지 않고 중간에 난 샛길로 빠져서 이면 도로를 따라 걷다가 도서관에 도착하는 방법.


첫 번째 코스는 볼거리가 무척 많다. 큰 대로변이라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가게도 많고. 하지만 대로변답게 상당히 시끄럽고, 도서관에 도착하기 위해 마지막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살인적인 오르막길(내 눈에는 경사가 80도는 되어 보인다 ㅎㅎ)이 무서워서, 요즘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지 않을 때도 그 길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두 번째 코스는 내내 완만한 오르막으로 되어 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단, 너어어어무 조용하고 한적하다. 폭이 꽤 넓은 이면 도로인데 양쪽으로 주차되어 있는 차는 많으나 지나다니는 차는 별로 없고, 편의점 한 곳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가게도 없는 그저 그런 주택가다. 그래서 한낮에 혼자 걷고 있으면 마치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처럼 전 인류가 멸망하고 오직 나 혼자 살아남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다.


그 이면 도로애서 볼 수 있는 풍경도 뻔하다.

재개발 예정인 낡은 집들 옆으로 새로 지어지는 높다란 건물, 더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길들과 절대 풀 수 없을 정도로 엉켜있는 전깃줄, 옆집 이야기가 들릴 것처럼 다닥다닥 붙은 서너 층짜리 빌라들과 거기서 제멋대로 입을 벌리고 있는 자그마한 창들, 베란다 건조대마다 알록달록 걸린 빨래들, 햇빛 아까울 새라 뭔가를 잔뜩 심어놓은 옥상 위 화분들(항상 같은 시간에 흰 러닝 속옷 바람으로 옥상에 나와 맨손체조를 하는 아저씨도 있음 ㅎㅎ), 사람보다 더 많이 만나는 것 같은 길고양이들과 하루 종일 묶여 심심해하는 것 같은 강아지, 통행에 불편을 드려 늘 죄송한 공사 안내 표지판과 성격 까칠해 보이는 주차 금지 빨간 깔때기, 헌 옷보다 더 헌 것 같은 헌 옷 수거함, 1년 내내 눈 한 번 안 오는 동네(부산입니데이)에 1년 내내 놓여있는 제설함, 쓰레기 무단 투기 경고문이 붙은 전봇대 아래에 더 기를 쓰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쓰레기봉투들까지….


툭하면 바닥을 보며 걷는 내가 그 어느 것에도 무관심한 나의 무기력함을 조금 떨쳐내고서 그 똑같은 풍경에서 굳이 ‘다른 그림 찾기’를 한다면, 어제는 파란 대문 앞에서 삼색 고양이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옆 담벼락 위에서 깜장 고양이가 날 째려보고 있는 정도? 어제는 이쪽 도로가 공사 중이었는데 오늘은 저쪽 도로가 공사 중인 정도? (그놈의 도로 공사는 참으로 자주도 한다. 맨날 여기 파고 저기 파고)



그런데 나는 이토록 늘 똑같은 산책이 그리 나쁘지 않다. 심지어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길에서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날마다 새로운 것, 특별한 것을 찾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기도 바쁜 요즘 세상에 이 무슨 지루하고 어이없는 말이냐 싶겠지만, 나는 너무나 똑같아서 놀랄 일이 전혀 없는, 그래서 놀랍도록 심심한 나의 산책이 오히려 좋다.


평범한 옷을 입은 평범한 몸매의 아줌마가 몇 시간 간격으로 왕복해서 지나가도 전혀 기억에 남지 않을 단조로운 풍경 속에서 나 역시 평범한 풍경이 되어 걷는 일은 어쩐지 마음이 편하다. 갑자기 놀라거나 당황하는 일 없이 무기력한 표정으로 내내 걸을 수 있어서도 좋다. 그렇게 실컷 무기력한 표정을 하고 느적느적 걸으면 떨쳐버리고 싶은 나의 무기력을 길바닥에 조금씩 버리고 오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어느 모퉁이나 길바닥에서 말도 안 되게 사소하지만 특별한 무언가를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모래밭에서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한 듯 반갑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 익숙해서 편한 길 위에서 가만가만히 무기력함을 버리고 작고 사소한 기력을 하나둘씩 주워 모으며 산책하는 중인 것이다.



색다른 경험과 신선한 자극은 분명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비타민 같은 것이지만 매번 낯선 곳을 걷는 건 되려 피곤한 일이다. 새로운 풍경이 필요할 때는 좋은 사람과 여행을 가서 실컷 보고 오면 된다. 다만 지금은 늘 똑같은 길, 익숙한 풍경 속을 없는 듯이 걸으며 조용히 나를 위로하는 것이 좋다. 똑같은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는 게 전부인 TV 프로그램 ‘삼시세끼’를 계속 보면서 나도 모르게 힐링 받는 것처럼. n


photo by 눈큰 /  iphone 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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