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편이 일하고 있는 제주에 다니러 갔다가 한 편집숍에 들른 적이 있었다. 빼곡히 들어찬 소품들 속에서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깥쪽은 단색, 안쪽은 알록달록한 꽃무늬 천으로 만들어져 양면으로 사용 가능한 리버서블 에코백이었다. 처음엔 단색만 보여 잘 몰랐다가 가방을 뒤집어 안쪽 꽃무늬를 보는 순간, 나는 “예쁘다”는 말을 백 번쯤 외쳤고, 결국엔 조금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지갑을 열고 말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꽃무늬라면 그렇게 질색하던 사람이 참!”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란 사람은 참으로 꽃무늬를 멀리했던 사람.
물론 꽃은 좋아한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받는 것도 좋아하고. 하지만 그런 꽃을 내 곁에 들이는 데는 무척 인색했다. 아니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게 다 우리네 엄마들과 할머니들의 꽃과 꽃무늬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세뇌당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내가 봐온 엄마들과 할머니들에게는 늘 단체 주문이라도 한 듯 꽃무늬가 들어간 물건이 있었다. 옷이며 가방 같은 개인 물품에서부터 이불이며 쿠션이며 각종 집안 살림에 이르기까지 온통 꽃밭이었다. 특히 그녀들의 주 무대였던 부엌은 그야말로 분홍색과 빨간색, 그리고 꽃무늬 일색. 지금과 달리 아이보리나 그레이 톤의 민무늬 주방용품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긴 했지만, 심플한 것이 있어도 굳이 꽃무늬를 집어 들었던 그녀들. 어느 순간 나는 꽃무늬에 부당한 편견을 갖게 되었다. 꽃무늬는 정말이지 올드하다고, 그런 건 나이 든 여자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꽃무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저 꽃처럼 예뻤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단지 그 예쁜 것을 진심으로 예뻐하며 가까이 두었을 뿐이다. 그것이 그녀들의 지친 여름과 쓸쓸한 가을과 초라한 겨울을 꽃처럼 화사한 봄으로 채워주길 바라면서. 마치 나이 듦을 거부하듯 꽃무늬를 거부해 왔던 내가 이제 와 꽃무늬 에코백을 사고 보니 슬그머니 그 마음이 들여다 보인다...
여전히 나와 내 주변에는 꽃무늬라곤 거의 없다. 여태껏 가지고 있던 취향이 하루아침에 확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설령 바뀌었다고 갑자기 모든 살림을 몽땅 그 취향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새로 장만한 에코백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이제 꽃으로 서서히 물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