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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Dec 27. 2019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을 거야

내 여행의 이유

photo by noonknn / Nikon D90



지난주, 온 가족이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얼마만의 일상 탈출인지….

방구석을 사랑하는 집순이 번역가에게도 사랑하는 가족과의 여행은 크나큰 즐거움!


여행을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나는 부지런히 짐을 싸… 는 게 아니라 부지런히 집을 치웠다.

여행을 끝내고 마음은 힐링했어도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몸으로 집에 되돌아왔을 때,

변함없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일상을 마주하기 싫은 나의 오랜 버릇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들어서며

‘와!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외친 후 산뜻하게 일상을 시작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여행 전에는 늘 두 배로 바쁜 나.

한번 치우면 며칠은 멀쩡한 베란다 청소부터 클리어하고, 빨래통 빨래도 밀리지 않게 열심히 돌리고 말려서 옷장 속으로 클리어! 며칠간 본의 아니게 건식 상태가 될 화장실 청소도 꼼꼼히 클리어하고, 돌아서면 난장판이 되는 아이들 책상이며 바닥도 깔끔하게 클리어! 평소에도 정리가 잘 안 되는 냉장고까지 탈탈 털어 클리어한 뒤, 마지막으로 벌레가 꼬이지 않게 재활용품 수거함과 쓰레기통까지 싹 비우면 끝.


물론 휴가지에서 볼 전자책과 영화도 빼먹지 않고 다운받았다.

두 개의 커다란 캐리어 배를 잔뜩 불리는 와중에 말이다.

여행보다 더 설렌다는 여행 준비의 나날들.

이제 여행이 시작되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을 거야! 하면서.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내가 좋아하는 안선배가 해줬던 말처럼,
인생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진 걸 소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훌륭한 경험인지 모른다.  

김동영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중에서




photo by noonknn / Nikon D90


+

사전에서 ‘여행’을 검색하면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라고 적혀있다.

만약 수정할 수 있다면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라는 말 뒤에

혹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라는 말이 들어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n



+

사실 공백이 생기는 게 싫어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브런치에 올리고 싶은 글의 초고를 미리 몇 개 써두었다. 여행 중에 조금만 다듬어서 올리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은 내 여행. 여행이 끝나고 1주일이 넘어서야 겨우 이 글 하나 써 올리고 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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