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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Dec 02. 2019

유치해도 좋으니까

꽁냥꽁냥


photo by noonknn / iphone xs


얼마 전 놀러 간 펜션에 있던 커플 머그잔.

그릇을 찾느라 싱크대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꽁냥꽁냥 하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하면서 찰칵!)


사실 알록달록 앙증맞은 것들은 괜히 닭살스럽다며 질색하는 내 취향 때문에

우리 집에 있는 커피잔이며 머그잔들은 온통 무늬 하나 없는 흰색 혹은 회색.

오래간만에 요런 알록달록 컵들을 보니 참 귀엽기도 하고,

그걸 예쁘다고 연신 만지작거리는 내가 나이 들었나 싶기도 하고 그랬다.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철수와 영희가 손 붙잡고 간다
 철수는 회색 모자를 썼고, 영희는 빨간 조끼를 입었다
 바둑이는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 앞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창식이 앞을 지날 때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낀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럽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앉아
 가져온 김밥을 먹는다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희가 엄마처럼
 철수의 입에 김밥을 넣어준다
 공원 매점 파라솔 그늘 아래 우유를 마시던
 숙자가 철수와 영희를 바라본다
 숙자는 영희가 부럽다
 
 일흔두엇쯤 됐을까
 철수와 영희는 동갑내기일 것 같고
 창식은 좀 위로 보이고
 숙자는 좀 아래로 보인다
 물론,
 영희와 철수는 부부다.



11월 달력을 오늘 떼어냈다.

이맘때면 늘 그렇듯이, 달랑 한 장 남은 12월이 외로워 보인다.

세상은 이미 겨울 한복판으로 들어갔는데, 거리에서도 뉴스에서도 온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에다 눈을 두어야, 무엇에다 귀를 기울여야 할지 모르겠다.


단어만 들어도 그 모습이 떠올라 닭살이 돋는 ‘꽁냥꽁냥’이란 말은

‘연인끼리 가볍게 스킨십을 하거나 장난을 치며 정답게 구는 모양’이란 뜻의 부사.

시린 겨울에는 유치해도 좋으니까

예쁜 머그잔에 따끈한 뭐라도 담아 주고받으면서

꽁냥꽁냥 하는 서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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