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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Sep 20. 2024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건강 검진을 받았다.

함께 검진을 받을 사람도 없고 수면내시경에 동행해야 할 보호자도 없었지만 혼자 씩씩하게 병원에 갔다.

평소에 목이 자주 말라서 시도 때도 없이 마시던 물을 전날 저녁 9시부터 못 마셔서 검사 전에 좀 힘들었는데, 뭐 대장 내시경을 받기 위해 이상한 물약을 꾸역꾸역 마시고 화장실을 수차례 들락날락하다가 병원에 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참을만했다.


평일인데도 건강검진센터에는 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병원 직원들도 검진자들만큼이나 많았다. 날마다 각양각색의 검진자들을 수없이 상대해왔을 직원들의 기계적인 친절을 받으며 검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2년마다 국가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늘 기본 검사에 위내시경만 추가해서 받았었는데, 올해는 오십을 맞아 몇 가지 검사를 더 받아보기로 했다.


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이 방 저 방 들락거리며 오만 가지 검사를 받는 동안 나는 속으로 내 몸과 건강에 대해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키가 컸네? 뭐지? 거북목 고치려고 자세를 열심히 고쳐 세운 덕분인가? 몸무게는 집에서 잴 때랑 똑같이 나왔네. 집에 있는 체중계가 고장은 아닌 모양이군. 어제저녁부터 금식을 했더니 배가 호~올쭉하네? 평소에도 이랬으면. 시력은 생각보다 괜찮은데? 청력은 흠, 버튼을 몇 번 안 눌렀는데 벌써 끝났다고? 피 뽑는 건 여전히 똑바로 못 쳐다보겠고, 유방 촬영은 여전히 눈물 쏙 뺄 정도로 아프고, 자궁경부암 검사는 여전히 민망하고, 심전도 검사는 심장이 공연히 더 나대고, 초음파 검사는 별말 없이 금방 끝나는 거 보니까 괜찮은 거겠…지? 제일 걱정되는 골밀도 검사와 뇌 CT, 경추 CT, 갑상선 검사 등도 부디 결과가 괜찮게 나오길. 그리고 대망의 위내시경. 사전 준비를 마친 뒤 검사받을 침대에 옆으로 누워 주사를 맞으면서 입에 그 이상한 플라스틱 같은 걸 물었을 때 '아, 무섭다. 얼른 잠들자. 얼른.'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는 순간, 간호사가 날 깨운다. 왜 깨우죠? 뭐가 잘못됐나요? 네? 벌써 검사 끝내고 나와서 20분이나 잤다고요??


아무튼 그렇게 신기하면서도 섬뜩한 숙면 경험을 끝으로 건강검진은 끝이 났다. 나는 방금 마취에서 깬 사람 같지 않게 남은 절차를 잘 마무리하고 (직원이 깜박해서 안 준) 무료 식사권까지 야무지게 달라고 해서 받은 다음 검진센터를 나왔다. 그리고 그 식사권으로 교환받은 야채죽을 들고 혼자 또 씩씩하게 집으로 갔다.


"자신이 별 네 개나 다섯 개를 줄 만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거나 스스로 그런 순간을 만들어내다 보면 복이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내게는 ‘제정신으로 옷을 입고’ 잠에서 깬 후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디고, 욕실로 가서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별 다섯 개짜리 경험이다. 이 세상에는 건강하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 오프라 윈프리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중에서


평소에 몸에 나쁜 짓 안 했고, 마음도 곱게 쓰려고 노력했고, 건강 검진도 홍반성 위염 소견 외에는 특별한 말을 듣지 않고 끝냈으니까, 1~2주 후에 받게 될 결과지에도 빨간불을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기대를 해 본다만, 결과지를 받기 전에도 초록불을 건넌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나이가 들어도 별 무리 없이 해내야 할 것들을 혼자서도 그냥 별 무리 없이 해내는 것부터가 이미 어느 정도는 건강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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