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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Jan 19. 2021

책 냄새를 사랑하는 내가

전자책에 빠진 요즘


1년 전, 고 2 올라가는 큰아이는 나름 치열한 선거를 거쳐 학교 도서부장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책을 잘 읽는 아이도 아닌데(;;) 1학년 때는 기를 쓰고 도서부에 들어가더니 2학년이 되면서 도서부장이 되겠다고 자진해서 나선 것이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아이 대답이…


“처음엔 생기부 쓰는데 조금이라도 유리할까 봐 그런 건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도서관 분위기와 냄새가 너무 좋더라고요. 어떻게 냄새가 조용할 수가 있죠?”


그 말에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우리 아이가 요렇게 감성적이고 멋졌나 하는 생각에서였고(뭐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 보이니까 ;;), 다른 하나는 그 모습이 어릴 적 나를 너무나도 닮아서였다.


내가 딱 그랬다. 책이라고는 누구나 다 아는 고전 동화들과 만화잡지 보물섬을 읽은 게 다였던 학창 시절의 내가 도서관과 책에 홀딱 빠진 이유가 바로 그놈의 ‘냄새’ 때문이었으니.

오래된 성의 벽처럼 쌓인 책들이 숨을 쉴 때마다 내뿜는 도서관 특유의 냄새. 햇살 좋은 날은 햇살 좋은 대로,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대로 도서관 문을 열면 왈칵 다가오던 그 조용한 냄새가 나를 설레게 했었다. 책을 펼쳐도 좋았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과 손때가 묻어있는 헌책 냄새부터 갓 구운 빵, 아니 갓 인쇄된 새책에서 나는 냄새까지. 나는 그 냄새들이 좋아서 아무 이유 없이 책장을 앞뒤로 휘리릭 넘겨보는 버릇도 갖고 있었다.


냄새를 좋아한 만큼 책도 많이 읽었다면 지금쯤 훌륭한 번역가(혹은 작가)가 되어있을지도. ‘책 냄새’만 좋아하고 ‘책 읽는 것’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나의 과거가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


그런 내가 요즘 전자책에 푹 빠져있다.

책 사이즈와 비슷해 제법 책 읽는 느낌이 나는 아이패드 미니를 사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자책 독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기분 좋게 버석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고, 책갈피에 예쁜 단풍잎 하나 끼워 넣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아무리 킁킁거려도 냄새가 나지 않는 전자책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책과 찐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독서가 진짜 ‘취미’가 되었지만, 종이책은 오히려 많이 처분했다. 일찍 찾아온 노안, 그리고 미니멀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그때 마침 전자책에 빠졌기에. 좋아하는 책은 그대로 고이 모셔두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다시는 펼쳐볼 일 없는 책들은 차근차근 정리해나갔다. 시원섭섭? 아니! 섭섭하지는 않고 시원했다. 책에 대한 나의 소유욕은 전자도서관, 독서 앱, 그리고 아이패드 용량이 함께 책임져주고 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여전히 책 냄새, 도서관 냄새를 사랑한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산책하듯 집 근처 도서관이나 크고 작은 서점에 조용히 가서 그 조용한 냄새를 조용히 맡고 올 것이다. (책을 빌리거나 사기도 하겠지요. 냄새만 맡고 온다고 썼더니 좀 변태 같기에…ㅎㅎ)


그나저나 햇볕에 말린 이불처럼 뽀송뽀송한 냄새가 난다는 방향제도 있던데, ‘도서관 No. 5’ 같은 향수는 혹시 안 나오려나?? 계속 집에만 있었더니 별생각이…. 쩝!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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