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이었다.
글을 쓰던 중이었는데, 과거 경험담 중 하나를 글감으로 빌려와야 해서 나의 지난 일기장을 갑자기 들춰보게 되었다. 일주일 전의 일도 가물가물할 정도로(ㅜㅠ) 머릿속 기억이 팍팍 지워지고 있는 나에겐 20여 년 동안 컴퓨터로 쓰고 있는 나의 일기가 제2의 뇌라 여길 만큼 소중하다. ㅎㅎ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나는 지난 일기를 들춰보지 않는다.
쓸거리만 있으면 시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기 파일을 열어 시시콜콜 일기를 써 두었지만, 단순히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왜’처럼 6하 원칙에 따른 과거 팩트를 알고 싶다면 캘린더 앱을 찾아보는 게 훨씬 빠르니까. 게다가 일기는 그 팩트 뒤에 나의 진솔한 감정들까지 실타래처럼 줄줄이 이어지질 않는가. 나는 굳이 그것을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내 일기장을 그저 기억을 보관해두는 서랍처럼 이용할 뿐이다.
물론 일기장을 감정을 마구 쏟아 버리는 해우소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일기에 적힌 감정들이란 대개 너무 높거나 낮은 것들이다. 어중간한 감정으로 하루를 보낸 날은 보통 일기를 잘 안 쓰니까. 그러다 보니 기분이 너무 좋아 쓴 일기를 읽고 있으면 앞뒤도 모르고 촐싹거리고 있는 내가 괜히 부끄럽고, 또 기분이 너무 나빠 쓴 일기를 읽고 있으면 그 우울한 감정에 다시 파묻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제는 달랐다.
마침 내가 들춰본 2017년 여름 가을 무렵의 일기들은, 일기임에도 모두 높임말의 서간체로 적혀있다. 왜냐하면 한동안 내가 일기를 (그때 내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치 먼 미래의 나, 그것도 흰머리의 호호 할머니가 되어버린 나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글들이… 이제 와서 읽어보니 뭐랄까…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이의 따뜻한 공감과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 일기들 역시 몸과 마음이 힘들어 넋두리하듯 쓴, 부족함 많은 글이었는데도 말이다. 어찌나 마음이 편해지던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최근에 읽었던, 어느 현란한 에세이보다 내게 더 와닿았다.
그러면서 소름도 돋았다. 아니 소름이 돋을 만큼 뭔가 찌르르했다.
아직 호호 할머니는 안 되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내가 보낸 편지를 진짜 이렇게 읽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날들을 무사히 넘기고 2021년을 살고 있는 나는 오늘 그 편지들에 대한 짧은 답장을 보내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힘들었겠지만 참 잘해줬어. 고마워. 덕분에 내가 살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다시 나의 일기를 할머니가 된 미래의 나에게 부치기로 했다.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