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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Apr 28. 2022

직업병만큼 무서운 번역가의 습관


번역 잡지 《번역하다 vol.3》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다.


번역 공부가 내게 약이 됐는지 독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병이 생겼기 때문이다. ‘번역 공부 후 스트레스 장애’랄까? 번역을 배우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글을 쓸 때마다 김훈 작가처럼 한 글자를 두고 고심하는 일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언감생심 김훈 작가와 동급선상에 나를 얹으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어느 날은 ‘존엄’이라고 쓸까, ‘존엄성’이라고 쓸까를 두고 하루를 보낸 일도 있다. 그 '성'이라는 글자 하나가 그렇게도 시간을 잡아먹는 아귀였는지 몰랐다. 이 문장을 쓰고 또 고민한다. '아귀'라는 단어를 여기에 써도 되는 건가?
(중략)
한글 문서의 빨간 줄도 점점 무서워졌다. 빨간 줄 강박증이 생길 지경인데, 아무리 다른 단어로 바꿔 써도 빨간 줄이 안 없어질 때가 있어서 목덜미 잡는 일도 많다. 누가 ‘에세이랑 번역은 달라요. 쓰고 싶은 대로 쓰세요, 빨간 줄은 꺼지라고 하세요’라면서 궁딩이 팡팡 두들겨줬으면 좋겠다. (역시 궁딩이도 빨간 줄이다. 표준말은 궁둥이다. 정감 상 ‘궁딩이’라고 쓰면 안 되느냐고요) 어쩌다가 쓰게 되는 문법적 파괴를 ‘시적 허용’처럼 ‘수필적 허용’으로 관대하게 봐줄 수는 없는 건가? 그냥 은어도 쓰고 비속어도 좀 끄적거리고 요즘 유행어도 남발하면서 내 마음대로 글을 쓰고 싶다는 반항심이 생긴다. 이런 내가 (읽지는 않았지만) 민서영 작가의 『쌍년의 미학』이라는 제목을 발견했을 때,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 내용에서 ‘이 뭥미?’, ‘ㅋㅋ’, ‘ㅠㅜ’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통쾌하던지.
(중략) 아, 이렇게 막 징징거리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지는군. 
- 《번역하다 vol.3》 놀자 님의 ‘한 끗 차이’ 중에서



내 책 <이런 번역가도 있습니다>를 쓸 때 나는 번역가의 직업병에 관한 이야기를 따로 넣지 않았다. 이미 많은 번역가들이 여기저기서 그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한창 번역 일이 바쁠 때는 부끄럽지만 나도 나름 그 이야기의 산증인처럼 번역가 직업병을 달고 살았다. 신체적으로 어깨와 손목의 만성 통증이라든지 잦은 소화불량 등에 시달리는 건 기본. 운동 부족으로 자꾸만 가늘어지는 다리에 비해 자꾸만 튀어나오는 아랫배 때문에 몸매가 외계인 ET를 닮아가는 끔찍한 증상도 보였다. 그뿐인가. 책을 보다가 오타와 잘못된 표현이 나오면 집중을 못 하는 독서 불능증에 걸려있었고, 카톡 등을 하다가도 상대방의 틀린 맞춤법을 나도 모르게 지적하는 얄미운 오지라퍼병도 앓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위에 소개한 글에서처럼

단어 하나를 두고 밤새 고심하는 '번역 공부 후 스트레스 장애'나 '빨간 줄 강박증'도 겪었구먼요. ㅎㅎ


이런 직업병들은 번역 일이 없는 요즘 상당 부분 치료되긴 했는데(치료되었는데 왜 안 기쁘고 슬프지? ㅠㅠ), 그럼에도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저장 강박증에서 비롯된 '습관성 저장 단축키 증후군'이다. 




번역가가 아니더라도 컴퓨터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저장이나 백업을 제대로 하지 않아 중요한 작업물을 잃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안타까운 경험을 몇 번 해봤기에 문서를 저장하는 데 상당히 진심인 편. 그날의 번역 작업이 끝난 후 원고 파일을 이중삼중으로 백업해두지 않으면 불안하다. 무엇보다도 문서 작업 중간중간에 저장 단축키(ctrl+s 혹은 command+s)를 누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습관이 되어도 너무 습관이 되어 문제다. 문서 작업이 아닌, 예를 들어 블로그 포스팅을 작성하는 중이거나 남의 글에 댓글을 달다가도 문장이 끝나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그놈의 저장 단축키를 누른단 말이죠. 그때마다 뜨는 '별도 저장 창'을 매번 닫고 또 닫아야 하는데 상당히 번거롭다.


하지만 나는 이 고질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지는 않을 듯.

창을 닫는 번거로움보다는 작업물이 날아가 새로 작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훨씬 더 클 테니까.




그나저나 이희재의 《번역의 모험》란 책에 보면 번역자는 새로운 말도 과감히 만들어낼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번역 공부  스트레스 장애' '빨간  강박증'이란 단어도 그렇고 '습관성 저장 단축키 증후군' 같은 말을 만드는 재미가 있네요. :)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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