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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Jan 27. 2022

안방 번역가의 새 작업실


뼛속까지 집순이인 나. 그동안 가족과 집안일의 끝없는 방해공작 속에서도 ‘안방 번역가’를 끝까지 고수했던 나에게 요즘 아주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집 근처에 또 하나의 번역 작업실을 마련한 것이다.

오해는 마시길, 진짜 작업실을 차린 건 아니고,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스터디 카페 이야기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에도 독서실 같은 걸 이용해 본 적이 없다. 오로지 학교 아니면 집. 죽으나 사나 그 두 곳에서 집중력을 끌어모아 공부해왔고, 그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엄마의 두 다리에 매달려 징징대던 우리 아이들이 커버린 뒤에도 공부든 번역이든 그저 집에서만 할 줄 알았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스카를 작년에 수험생이던 큰아이 덕분에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이가 학원 대신 스카 정액권을 끊어달라기에 스카가 뭐냐고 물었더니, 요즘 젊은이들은 스터디 카페, 줄여서 스카라고 하는 곳에서 공부하는데 시설이나 분위기가 좋고 이용도 편리해서 카공(카페에서 공부하는 것) 만큼 인기가 좋다고 하더라는. 도서관을 사랑하는 나도 틀림없이 그런 곳을 좋아할 거라나 뭐라나. 그러면서 나더러 맨날 집에만 있지 말고 같이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그 말에 솔깃해진 나는 곧바로 큰아이를 따라 스카 나들이에 나섰다.


처음엔 키오스크에서 당일 입장권을 끊는 것도 서툴러 어버버거리긴 했지만, 과연 입장 후에는 조금 전 어버버 했던 일을 완전히 까먹을 만큼 단번에 스카 분위기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집중이 잘 되는지…. 집에만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집중력 짱인 인간인 줄 평생 몰랐을 것이다.


아무튼 그 후로 나는 마감이 다가와 번역 일이나 글쓰기에 완전 집중해야 할 때마다 틈틈이 혼자 스터디 카페를 찾았다. 물론 한동안은 천장 여기저기 붙어있는 CCTV가 날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뒤통수가 간지럽기도 했고, 또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간식이라도 잠시 먹으러 나간 사이 낯선 곳에 맥북을 혼자 놔두면 맨날 집에만 있던 그 녀석이 불안해서 울지는 않을까(ㅎㅎ) 걱정도 되었더랬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몰입의 즐거움’을 이기지는 못했다. 다만 조금만 더 집과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다면 더 자주 애용해 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최근 우리 집 코앞에 떡하니 스터디 카페가 새로 생긴 것이다.


이참에 거길 아예 내 작업실로 만들까? 하고 답사를 나갔는데… 흠, 노트북으로 타자 작업을 해도 되는 워크룸은 널찍한데 이용객도 별로 없어 답답하지 않고, 건물 밖에서 들리는 백색 소음도 있어 좋았다. 또 조명은 적당하고, 의자는 딱 맞고, 화장실은 불편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맛있는 아메리카노 커피가 공짜!   


그리하여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스터디 카페의 48번(내 나이랑 똑같은 49번은 굳이 피해서;;) 좌석은 나의 제2의 작업실이 되었다. 앞으로는 안방보다 이곳에서 더 많이 번역하고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이 쓰는 공간이니만큼 아무래도 안방보다는 뭐든 조심스럽고(그래서 더 좋은 점이 있음) 또 하루 몇 천 원의 비용이 들긴 하겠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한 칸의 공간’과 ‘집중의 시간’을 기꺼이 살 것 같으니. n  



하지만 여러분은 저처럼 고생하지 말고 똑똑하게 상징적인 독립의 공간을 일찍 마련하셨으면 좋겠어요.
(중략)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글이 써져요. 저도 마흔이 넘어서야 작업실이 생겼는데, 작업실을 관리하려면 돈도 시간도 들죠. 두 개의 공간을 청소하고 관리해야 하니까 두 배의 노동이 필요하잖아요. 하지만 일과 휴식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작업실에 있을 때는 일에 확 집중하고 집에 있을 때는 진짜 휴식을 취하는 거예요. 한 인간으로서의 일상적인 삶과 작가로서의 삶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야 해요.
-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중에서


번역 일이 없을 때도 공부하러 매일 올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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