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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Sep 12. 2020

밥 로스의 그림 그리기와 UX 기획

UX 기획은 큰 방향을 잡고 수행되어야 한다.

'참 쉽죠?'


한국에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을 관통해서 청소년기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가 밥 로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EBS에서 방영해주었던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프로그램은 당시 어린이들이 그림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데 큰 일조를 했고, '참 쉽죠?'가 사실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좌절감을 주는데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밥 로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때, 굉장히 많은 경우 처음부터 디테일을 신경 쓰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지루하다. 반면, 화가 밥 로스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앗!'의 연속이다. 디테일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큰 붓과 나이프로 슥슥 긋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면 그럴듯한 풍경화가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특유의 느긋함과 그와 상반되는 작화 속도를 가진 밥 로스 화가... 나도 밥 로스 화가를 쫒아 화가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순수 미술계에서 밥 로스 스타일이 얼마큼 인정을 받는지 나는 모르지만, 미술 교육계에서는 꽤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안다. 속도 있게 큰 틀에서 프레임을 잡고, 점진적으로 디테일을 완성해나가는 밥 로스 스타일은 그림 교육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의 사용자 경험 기획에도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읽어볼 만합니다:

· 제품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경영자/기획자
· 예산이 풍족하지 않은 기획 부서의 실무자
· 서비스 기획자 꿈나무



코끼리를 그리는 것과 사용자 경험을 기획하는 것의 공통점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은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그림을 그리는 것과 큰 틀에서 일치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과정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배운다:

· 그림을 그릴 대상을 정하고, 스케치북에서 구도를 잡고, 그림을 그릴 것들을 대충 배치해본다.
· 원경을 먼저 구성하고, 근경을 구성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은 단순하다. 어떤 것을 그릴지 확실하게 정하고, 스케치북에 어떻게 표현할지 결정한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것. 큼직큼직하게 그릴 것. 가장 확실히 해야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림 그릴 대상을 정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을 그릴지 대충이라도 정하고 그림을 그려야, 중간에 헤매지 않는다. 숲을 그리고자 하였으면, 숲을 그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나뭇잎을 그리게 된다. 아마도 숲을 그리고자 한 사람이 나뭇잎을 먼저 그리게 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만약 숲을 그리고자 생각하고 나뭇잎을 먼저 그렸다면, 나뭇잎과 어울리는 숲을 그리기는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코끼리 발가락이 몇 개나 있는지 아세요?


나는 종종 회사 동료들에게 코끼리를 그려보라고 한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일했던 많은 동료들이 코끼리를 그려보았지만, 그 누구도 코끼리 발톱을 그리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도 제외하지 않고, 코와 몸통을 먼저 그렸다. 동료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 '누가 봐도 코끼리!'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보통 코끼리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코와 몸통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코끼리의 일부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만약 코끼리 발톱을 먼저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혹은 코끼리의 코 주름을 먼저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코끼리를 그린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 3○세 이재원의 코끼리 그림이란... 누가 봐도 코끼리인 그림과, 코끼리 발톱을 그린 그림. 현생 코끼리 발가락은 여섯 개라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코끼리를 그려보라고 했을 때, 코끼리 발톱을 먼저 그리는 사람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사용자 경험과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자고 했을 때, 가장 마지막 디테일부터 기획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과 유사하다. 내가 어떤 경험을 개선하고자 하는지 확실하게 목적을 정하고 시작해야한다. 큰 틀에서 사용자에게 제공하고 싶은 경험을 구성해야, 각 구성의 세부적인 사용자 경험이 조화롭게 연결될 수 있다. 


아주 자잘한 경험의 변경을 누적하는 식으로 큰 그림을 만들고자 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문제는 정말 다양하다. 일부 디테일을 신경 쓰느라 전체 서비스에서 추구하는 사용자 경험과 전혀 동떨어진 형태가 된다.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것은, 중간 중간 멀리서 보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큰 그림을 알지 못하는 상태라면 균형을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면 형이학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코끼리를 만들려고 했더니, 만들다 보니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그 결과 역시 코끼리도, 코뿔소도 아닌 무언가가 되버리는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 우리 서비스가 추구하는 것은 초현실주의 예술인가, 극현실주의 기술인가?



아이디어에서 기획으로


종종 서비스 기획자가 최종 결과물의 아주 일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의류 구독 서비스를 처음부터 기획하고자 하는 사람이, '반품 프로세스'를 고민하고 있다던가, 아직 론치도 못해서 고객을 한 명도 유치하지 못한 플랫폼 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이 광고주를 위한 대쉬보드를 고민하고 있는 모습은 비교적 익숙하다. 코끼리를 그릴 때는 몸통과 코를 먼저 그리는 사람들이 왜 서비스 기획을 할 때만 되면, 발톱을 먼저 그리게 되는 걸까?


내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기획의 대부분이 '아이디어'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서, 순간 떠올린 좋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기획을 쌓아간다. 문제는 '순간 떠올린 좋은 아이디어'에 있다. 기획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을 기억해보자. 내 경우에는, 다른 서비스를 이용하다가, 밥을 먹다가, 혹은 잠을 자다가 아이디어를 얻고는 한다. 이러한 순간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별다른 제약 사항을 두지 않고,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아이디어'라는 녀석의 위치가 애매하다. 내 아이디어는 숲인가? 나뭇잎인가? 코끼리인가? 코뿔소인가?


우리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잡아 놓고 싶고, 현실로 가져오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용자 경험의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잘 검토해야한다. 번뜩이는 반품 프로세스를 떠올린 사람과 번뜩이는 광고주 대쉬보드를 떠올린 사람이 있다면,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우리 사용자 경험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에 얼마나 근접해있는지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숲을 그리는 과정에서, 표현의 디테일을 잡기 위해 나뭇잎을 그리게 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려진 나뭇잎은 아마도 전체 풍경과 잘 어울릴 것이다. 반면, 나뭇잎을 먼저 그린 사람이 그를 토대로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리는 과정은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뭇잎이 전체 숲과 어울릴 것인지 보장되지도 않으며, 언제 숲을 완성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나뭇잎을 보는 사람은 숲을 볼 수 없다.


그림과 기획이 다른 점은, 그림은 물질세계의 한계상 표현할 수 있는 디테일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용자 경험 기획은 무형세계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디테일을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디테일을 보기 시작하면, 더 이상 큰 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이상적인 반품 프로세스를 가진 서비스가 있는데, 구매 하는 과정이 형편 없다면 그것은 좋은 사용자 경험인가?

대뇌피질에서 차지하는 감각의 비율에 따라 인체를 구성한 펜필드의 호문클루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구성 중 어디에 있는지 고려하지 않으면, 전반적인 균형이 무너지기 쉽다. 감각의 비율에 따라 인체를 재구성한 펜필드의 호문클루스는 얼핏 보아도 일반적인 육체와 거리가 멀다. 뇌신경의학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호문클루스가 균형잡힌 신체를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가 전체 균형을 무시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집중해 일부 디테일을 신경쓰기 시작하면 우리 서비스 경험 또한 불균형을 이룰 것이다.



목적이 확실해야 빨리 갈 수 있다


화가 밥 로스는 보기에 유려한 풍경을 정말이지 빠른 속도로 그려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보면 디테일이 살아있기 까지도 하다. 밥 로스가 이토록 빠르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이유는, 방향과 목적을 확실하게 잡아놓고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용자 경험을 기획하는 사람이 빠른 속도로 기획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개선하고자 하는 사용자 경험,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사전에 정의한 틀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각각의 작은 요소가 큰 그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지 알 수 있다.

빠르게 작업이 진행된다는 것은 단순히 손이 빠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업의 효율이 높은 것이다.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은 단순하다.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하면 된다. 덜 중요한 일에는 덜 집중하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비스의 UX를 개선할 때, '개발 배경'과 '개발 목적'을 미리 기술해둠으로써, 내 작업의 큰 방향을 설정한다. '나는 코끼리를 그리고 있습니다.'와 같은 선언을 하는 셈이다. 빠른 속도로 기획을 해내가기 위해서는 '배경'과 '목적'을 현실적으로 작성하고, 기획서를 작성하는 내내 내가 '목적'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개발 배경과 개발 목적은 디테일할수록 좋다. 개발 목적은 사용자 경험 개선에만 국한하지 않고, 내부 리소스 강화나 다른 영역에 걸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조직에 기획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할 때, 반드시 배경, 목적, 목표 시간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해달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언제나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시선을 고정할 수 있다. 이 정도 하는 것만으로도 기획의 일부 상세들이 너무 디테일해져서, 중간에 목적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든다. 그리고 전체 기획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에 얼만큼 집중 할 수 있는지, 또 집중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균형을 잡을 수 있다.



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디테일이 잡힌다


나는 많은 스타트업이 다양한 이유로 디테일에 집착하는 모습을 봐왔다. 물론, 디테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쁜 서비스 기획 전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장이 과열되어 있을 때는 경쟁 우위를 갖기 위해서 사용자 경험이 제공해주는 디테일을 신경 써야 하기도 한다. 작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자원적으로 대기업의 절대 열위에 스타트업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아니다. 스타트업의 사용자 경험은 디테일보다는 신선함을 추구해야 한다. 최대한 많은 기획을 도전하고, 시장에서 신선하게 받아주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도가 필요하다.


속도를 낸다는 것이 곧 디테일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큰 틀에서 우리가 어떠한 기획을 하고자 하는지 방향이 명확했다면, 기획서를 작성하는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디테일한 사항이 나올 것이다. 화가 밥로스는 정교한 디테일을 세필 붓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붓과 나이프 터치에서 나오는 우연을 이용하여 표현했다.


스타트업이 사용자 경험을 기획하는 경우는 가벼운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디어를 기획으로 전환하는 것은, 사용자, 기존의 시스템, 우리의 상황 등 가능한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현실적으로 아이디어를 구현 혹 또는 실현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 아이디어를 기획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불규칙한 붓의 털과 나이프의 텍스처의 우연으로 디테일이 표현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아이디어가 발전한다. 이러한 아이디어의 발전을 기획서, 그리고 최종 서비스에 반영하는 것만으로도 당장은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디테일을 얻을 수 있다.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작은 차이로 명품을 만들고자한다면, 일단 명품 비슷한 것을 만들어 놓고 고려해보자. 스타트업의 무기는 디테일이 아니라 신선함이다.


밥 로스의 그림: 큰 틀에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디테일이 생기기도 한다.




만약 우리 서비스의 기획 상태가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서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를 다시 한번 시청해보자. 그럴해보이는 그림을 그리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세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필붓을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디테일을 표현할 수 있음에 감탄할  것이다.


사실 속도와 디테일을 함께 잡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스타트업 경영자의 입장에서 속도와 디테일을 선택하라면 나는 언제나 속도가 정답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천재 화가의 대명사,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황소' 연작을 보여주고 싶다. 피카소는 자신의 말년에 황소 본질을 최소한의 선으로 그리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그래서 디테일을 살린 작품과, 단순화된 작품 중 어느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단순한 진리다. 정말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이다.

피카소 전기 작품과 후기 작품



밥 로스: 그림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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