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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Sep 14. 2020

피자의 철학과 UX

피자를 먹으면서 배우는 사용자 경험 기획

나는 피자를 좋아한다.

따뜻한 도우 위에 풍부한 맛을 품고 있는 토마토소스와, 잘 녹은 치즈, 그리고 각종 토핑까지. 토핑은 또 어떠한가, 반반 피자를 시키면 고기를 사랑하는 완전 육식파인 나도 채식주의자와 함께 식사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또한 나는 평소 맛과 칼로리가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인데, 피자는 전통적이며 대표적인 고칼로리 음식이다. 맛없기가 힘들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내가 피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맛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피자가 피자 나름의 철학이 있는 음식이라고 믿는다.


나는 피자의 철학이 UX 디자인 철학과 굉장히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피자를 통해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UX 기획자가, 자신이 갖추지 못한 배경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피자의 철학


구글에서 '과학과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형이학적이고 난해하고, 복잡한 예시들이 나오는데, 과학과 예술의 공존을 찾는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피자라는 음식이 바로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좋은 사례이니까.


피자는 도우와 토핑이 어우러지는 음식이다. 맛있는 피자의 기준은 단순하다. 도우도 맛있고 토핑도 맛있으면 된다.


맛있는 피자의 도우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과학적인 일이다. 맛있는 도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의 양에 따라, 물, 소금, 이스트의 비율이 잘 조정되어야 한다. 맛있는 피자를 만들기 위해서 도우의 비율을 찾아가는 것은 과학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도우의 비율을 그대로 참조해서는 좋은 도우를 만들 수 없다. 남이 갖고 있는 화덕과 내가 갖고 있는 화덕은 다르기 때문에, 온도가 차이나고, 온도의 차이는 곧 조리 시간의 차이를 만든다. 조리 시간의 차이에 따라 증발하는 수분의 양이 다르다. 이렇게 만든 도우를 굽기 전에 어떤 환경에서 얼마큼 발효시킬지도 과학의 영역이다. 어떤 온도에서 얼마큼 구울 지도 과학의 영역이다. 피자 도우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계량할 수 있으며, 조건이 일정하면 내가 발견한 최상의 맛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맛있는 도우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만들 수 있다!

반면, 토핑을 올리는 것은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일이다. 심미적으로 아름다우며, 미각적으로 훌륭한 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토핑의 영역이다. 주방의 과학을 통해 개발한 최상의 도우에, 어떤 치즈를 올릴지, 어떤 토마토소스를 사용할지, 그리고 어떤 부재료를 사용할지는 모두 감각이 필요하다. 예술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대중 예술이 있듯이, 피자도 수퍼수프림, 포테이토, 베이컨체다치즈 같은 스테디셀러가 있다. 우리가 종종 미술관에서 현학적인 순수 예술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듯, 피자의 예술에도 순수 예술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 예컨대, 발사믹 딸기와, 통 정어리를 피자 토핑으로 사용하는 요리사는 나와 예술적 관점에서 아주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최악의 피자 3형제. 정어리 피자, 바나나 카레 피자, 발사믹 딸기 피자.


나에게 피자의 철학에 대해서 알려준, 오픈업 황창희 대표님 인터뷰:



때로 우리는 순수 과학적인 접근으로 UX를 기획해야 한다


모든 사용자 경험을 통틀어 당연히 개선해야 되는 영역은 없다. 작정하고 찾거나, 들어보면 개선점은 무한대에 가깝게 찾아낼 수 있다. 세계 최고 기업 가치를 가진 애플의 아이폰 역시 일부 사람에게 UX가 별로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과 선호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사용자 경험을 기획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 조차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UX 기획자가 어떻게 모두를 만족시키겠는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UX 기획자는 조직의 모든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선순위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 '포켓서베이'는 서비스를 개시한 지 이제 2년을 꼬박 채웠는데, 아직도 '회원 탈퇴' 페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회원 탈퇴 요청이 있을 때마다, 개발자가 직접 데이터베이스에서 회원 정보를 삭제 처리하고 탈퇴 결과를 메일로 알려주고 있다.


가입은 쉬웠지만.. 돌아가는 길은 제공하지 않는다. (아직)


이러한 결정의 이유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단 두 번의 서비스 탈퇴 요청을 받았다.
(개인 고객이 사용하는 서비스가 아니어서, 회원 숫자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회원 탈퇴를 하지 않는다고 지속적으로 비용을 청구하는 서비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발자가 회원 탈퇴를 1회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내외다.

회원 탈퇴 기능을 개발하는데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은 적어도 6시간 정도다.

이러한 숫자를 바탕으로 개발 효율을 계산을 해보면,

10분(탈퇴 처리 시간) x n(탈퇴 요청 수) > 3,600분

적어도 36회 이상의 탈퇴를 처리하지 않으면, 사용자 경험 개선에 투입한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는데, 지금 정도의 고객 탈퇴 요청; 1년에 2회 정도면 우리가 18년 정도 서비스를 제공해야 개발 비용의 손익분기를 넘기 때문이다.


UX 기획자는 단순히 아이디어 빵빵 터지는 서비스 기획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UX 기획자의 기획에 의해서 조직은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달려 나간다. 나는 개발자 출신의 UX 기획자도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량적 데이터의 처리에 능숙하며, AB 테스트를 수행함에 있어서 변인 설정하는 요령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영을 전공한 사람들 또한 충분히 좋은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량적 관점에서 글쓴이가 쓴 UX 글을 보고 싶다면:



그럼에도 UX 디자인을 잘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감각이 필요하다


나만의 경험일지도 모르지만, UX 디자이너 분들의 이력서를 받다 보면 많은 분들이 그래픽 디자인 관련 전공을 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한다는 것에 그래픽 디자인이 기여하는 바가 아주 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그래픽 디자인 출신 UX 디자이너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데에는 예술적 감각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소개한 회원 탈퇴 페이지 사례처럼, 모든 사용자 경험 개선과 개발 비용, 그리고 손익 분기를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능을 개발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기능은 우리 서비스에 굉장히 핵심 되는 사용자 경험을 제고하지만, 사실 이 기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용자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사용자 경험은 개선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사용자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개선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우리 조직이 제공하는 서비스인 포켓서베이도 이러한 사례가 있었다.

우리는 웹 설문 기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기존 사용자가 PC 환경에서 이미지를 업로드할 때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보보려고 했다.

많은 설문 참여자가 설문에 사진으로 응답하기 위해서 이런 과정을 걸쳤다:

· 스마트폰의 사진을 카카오톡을 통해서 나에게 전송한다.
· PC의 카카오톡을 열고, 채팅창에서 이미지를 저장한다.
· 파일 올리기를 열고, 탐색기 내에서 이미지를 찾아 올린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카카오톡에서 전송하면, 바로 설문 응답에 반영되도록 개선하면 독특하고 좋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어떠한 사용자도 이 과정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세상에 우리 서비스와 비슷한 레퍼런스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과정을 개선하는 것이, 다른 서비스를 사용하던 사람이 우리 서비스를 사용하게 되는 계기가 될 정도로 중대한 것도 아니었다.


사용자 경험을 기획하다 보면, 우리는 때로 이렇게 어떠한 데이터도 없는, 그리고 개선해도 어떤 데이터가 개선될지도 모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한다. 투자한 비용이 회수될지 안 될지 명확한 기준도 만들 수 없는 이 아이디어를 실현할지 말지는 감각적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감각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설문지에 노출 된 QR 코드를 휴대폰으로 스캔하면, 스마트폰의 이미지를 바로 전송할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 출신 UX 디자이너가 학교 혹은 지난 경력, 더 나아가서는 삶의 궤적에서 습득한 예술적 감각은 전형적인 소프트스킬이다. 이러한 소프트스킬은 누가 쉽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준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뙇"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다. 소프트스킬을 익히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과 경험치가 필요하다.


반면,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과를 정리하거나, 기획서를 작성하는 것 자체는 하드 스킬이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수식과 적용 수치를 알려주면 누구나 엑셀을 통해서 값을 구해낼 수 있고, 기획문서를 작성하는 것 또한 기획서 작성 원칙을 만들어두면 누구라도 작성해볼 수 있다. 다른 UX 기획자들이 짜 놓은 스토리보드를 열어서, 순서대로 생각을 배치하는 정도로 충분히 협업 가능한 수준의 기획서가 나온다.


만약, 지금까지 그래픽 디자인만 해와서, 혹은 순수 예술을 해왔기 때문에 데이터를 작성하는 것도, 기획서를 작성하는 것도 자신이 없는 UX 기획자 꿈나무가 있다면, 조금 더 자신을 가져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체득하기 어려운 것은 소프트스킬, 즉 예술적 감각이다. 예술적 감각을 갖춘 여러분은 자신을 가져도 좋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뿐만 아닌, 편집자, 의류 디자이너 역시 사용자 경험 기획자 영역에 도전할만하다고 생각한다.




피자집 사장님께, 왜 피자를 만들기 시작하셨냐고 묻는다면 각자 다른 이유를 말할 것이다. 피자를 만들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떤 공부를 하셨는지 묻는다면 역시 각자 다른 배경을 말할 것이다.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맛있는 피자를 만드는 것이다.


맛있는 피자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자를 많이 만들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정말 맛있는 피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피자의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남들보다 빨리 맛있는 피자를 만들 수 있게 되기 위해서도 피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UX 기획자로서의 커리어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과학에 가까운 배경을 갖고 있어서, 예술적 감각에 자신이 없어서 좋은 UX 기획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는 순수 예술에 가까운 배경을 갖고 있기에 좋은 UX 디자이너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과학자에게는 과학자 나름의 UX 기획이 있고, 예술자에게는 예술자 나름의 UX 기획이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다른 영역을 찾아나가는 것, 그리고 많은 UX를 디자인해보는 것이 좋은 UX 기획자가 되기 위한 기본 소양이 아닐까?


이렇게 써놓으니 피자에 미친 사람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나는 피자보다는 치킨파다. 치킨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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