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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Sep 03. 2020

경영자도 UX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스타트업 대표가 UX 디자인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좋은 기획자? 좋은 디자이너?

둘 다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틀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좋은 사용자 경험은 디자이너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UX 디자이너가 세기의 천재여서 기술 개발과 자금 조달, 서비스 운영을 모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좋은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고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UX 디자인 문서에는 UX 디자인을 단순히 어느 한 기술의 능력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능력을 요구한다고 이야기한다.

최근 여러가지 책을 읽으면서 정립한 우리 조직의 사용자 경험에 대한 정의. 다양한 분야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픽 디자이너 혹은 HCI 디자이너가 개발에 대한 이해도를 증가시키거나, 사용자 데이터 분석 방법을 배우는 것은 가능하다. 반대로 개발자가 인지심리학을 배우거나, HCI 디자인을 배우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런데, 그래픽 디자이너, 기획자, 그리고 개발자가 학습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 조직 경영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조직 경영에 대한 이해도를 갖추고 있으면 굉장히 유리하다. 디자이너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려면 자금과 조직의 지원이 필요한데, 회사의 경영 상태에 따라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 세상에 살고 있고, 어떤 형태든 자원이 투입되지 않으면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스타트업의 경영자라면 반드시 사용자 경험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UX를 만들기 위해서 생각해야 하는 제약 조건은 경영의 전반적인 상황과 맞닿아있다.


·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는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한가?
· 우리 조직은 이 아이디어를 구현하는데 얼마큼의 자원(시간, 인적, 물질적)을 소비할 수 있는가?
· 이 아이디어를 통해서 우리 조직은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 투자한 만큼 회수할 수 있는가?
· 이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자원을 투입한 만큼 우리가 잃게 되는 다른 사업적 기회는 무엇이 있는가?
· 이 아이디어는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사업적 기회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
· 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플레이리스트 중에 비용 대비 효율이 어떤 편인가?
· 우리는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를 갖고 있는가? 우리 팀은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 만약 지금 당장 할 수 없다면, 새로 팀을 구성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가?
· 우리 디자이너/기획자는 이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사의 경영 사정을 잘 알고 있는가?


우리 회사가 잘돼서 여유가 있다면 많은 자원을 투입하여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잘되고 있지 않다면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은 굉장히 한정적일 것이다. 스타트업에서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은 대기업들에 비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기 때문에, 자원의 전략적인 운용이 필요하다. 스타트업 경영자는 어떻게 하면 적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읽어볼 만합니다:

· 제품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경영자
· 예산이 풍족하지 않은 기획 부서의 실무자
· 서비스 기획자 꿈나무
· 좋은 UX가 뭐예요? 고민하는 기획자



Cut to "Daylight"


우리 조직은 이제 겨우 열명 남짓이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작은 스타트업이다. 적은 자원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으로 가장 긍정적인 사용자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 역설적인 방법을 취한다.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의 경험을 우리가 원하는 흐름으로 제약하고 제한하는 방법으로 UX를 기획한다.


미국이 열광하는 스포츠 미식축구에서는 공을 들고 달리는 '러닝백' 포지션 선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공을 차서 상대방의 골대에 넣으면 3점을 얻을 수 있는 반면, 공을 들고 상대방의 골대까지 달려가서 '터치다운' 할 수 있으면 6점을 득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미식축구는 힘과 힘을 부딪혀 천천히 수비팀을 골라인까지 밀어 가지만, 잘 달리는 '러닝백' 선수를 보유한 미식축구 팀은 굉장히 효율적인 방법으로 점수를 득점할 수 있다. '러닝백'이 상대 팀의 두터운 수비라인을 돌파하고 나면, 그 누구도 골대까지 질주하는 '러닝백'을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먼 거리를 주파해서 점수를 낼 수 있다.


잘 달리는 러닝백을 보유하고 있는 팀의 가장 효율적인 득점 방법은 "런"이다. 러닝백이 어떻게든 상대방의 수비선을 넘게 하면, 빛나는 길을 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러닝백을 저지할 수 있을까?


달려 나가고 싶은 러닝백에게 달리고 싶은 길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공간을 만들어서 러닝백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리게 유도한 후, 시각의 사각에서 태클하는 것이다. 그러면 효율적으로 상대팀의 러닝백을 저지할 수 있다. 예측 가능한, 집중 가능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공간이 상대방의 플레이에 의해서  만들어지면, 러닝백이 어느 공간으로 달려올지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기에, 자원을 집중하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방의 플레이를 유도할 수 있다면, 필요한 만큼 자원을 집중하여 효율적으로 방어해낼 수 있다.

러닝백이 달려 나갈 수 있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 길의 끝은 골대까지의 데이라이트가 아닌 시야의 사각에서 들어오는 강력한 태클이다.

좋은 사용자 경험을 만드는 효율적인 방법은 러닝백을 제어하는 방법과 일정 부분 동일하다. 사용자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다. 사용자 행동을 유도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①인지심리학적으로 접근하여 사용자에게 더 나은 행동처럼 보여 스스로 행동하게 하거나, ②사용자의 행동에 제약을 두거나.

조직 내에 사용자 경험을 인지심리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용자의 행동에 제약을 두는 것 역시 굉장히 좋은 방법이다. 사용자 행동에 제약을 둠으로써 조직의 자원 사용 효율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된 개념이지만, 넛지는 사용자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인지심리학적 접근으로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넛지는 정말로 읽을만하다.



사용자의 니즈에서 벗어난 사용자 경험은 무조건 나쁜가


이 도로는 사용자의 니즈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니 나쁜 디자인인가? 우리 의도대로 걸으면 길을 걷는 사람의 신발에 흙이 묻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많은 UX 디자인 관련 문서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대부분이 '사용자 경험'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다른 의미로는 서비스 기획자 혹은 디자이너를 제외한 다른 이해관계자의 입장은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용자의 니즈에 기반하여 사용자 경험을 만들면, 좋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런데, 사용자 니즈에 기반한 사용자 경험이 우리 조직에도 도움을 주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보면, 번듯한 인테리어를 제공하는 환경에서, 잘 교육받은 종업원들이, 무료로 음식을 제공해주는 식당에 대한 수요는 전 세계 어디에도 있을 것이다. 모든 좋은 사용자 경험이 조직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조직에 도움을 주는 좋은 사용자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용자 경험을 통해서 어쨌든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돈을 벌고 싶다...


사회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이라면, 어떤 서비스를 만들고자 할 때 사실 사용자 경험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사용자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이다. '회사'라는 이름으로 정의되는 조직의 궁극적인 목적은 금전적 이익일 것이고,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투자 대비 기대 수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투자 대비 기대 수익을 높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제한과 제안. 이제 우리의 서비스의 디자인과 사용자 경험은 일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안 좋은 사용자 경험인가?

사용자들이 우리 서비스에서 의도되지 않은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면, 어떤 것이 가장 효율적인 해결 방법일까? 적어도 나는 의도되지 않은 행동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자원을 사용하는 것은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측하지 않은 사용자 이용 패턴이 나타났을 때, 그 행동을 제한하는 것도 좋은 사용자 경험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우리 의도대로 만든 길을 들으면 신발에 흙이 묻지 않아요!'라고 디자인했어도, 일부 사용자는 흙길을 걷고 신발에 흙이 묻었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자원을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 있을 때, 사용자 경험만을 고려한다면 사용자들이 이용하는 흙길을 모두 포장 도로로 바꿀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제공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가 고객의 신발에 흙이 묻지 않길 원하는 것이라면, 간단하게 흙길로 가는 길을 임시로 막아버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용자에게 심리적/물질적 보상을 해주는 것도 방법이다. 길 위에 돈을 뿌려 놓으면 사람들은 흙길보다는 우리가 디자인한 길을 선호할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안 좋은 사용자 경험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기능 사용하는 거 너무 불편해요


나는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많은 고객들이 지속적으로 불편하다고 개선 요청을 주는 기능 하나를 거의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대로 두고 있다. 그리고 그래픽적으로 완전히 잘못 출력되는 페이지 하나를 거의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방치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운영 조직 내에서도 개선 의견이 나왔지만, 나는 이 기능을 수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보고 받은 기능의 불편함이 실제 고객 탈퇴 혹은 이탈로 이루어진 사례를 단 한 건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치하고 있는 페이지의 이용 빈도는 GA를 찍어보았을 때, 전체 사용자의 0.6%만 한 번 눌러보고 마는 아무도 안 쓰는 기능이었다. 이 사용자 경험은 개선해도 우리가 당장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거나 신규 기능을 개발하는데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개선해야 하는 부정적 사용자 경험은 없다. 안 좋은 사용자 경험을 발견했을 때는, 반드시 개선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모든 부정적 사용자 경험을 다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면, 지금까지 조직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기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당당하게 해 보자면,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회원 탈퇴' 페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도 회원 탈퇴를 요청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회원 탈퇴 요청이 있을 때, 직접 데이터베이스에서 회원 정보를 삭제 처리하고 결과를 메일로 통보해주고 있다.

가입할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랍니다.

너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당연히 기획하는 기능이지만, '회원 탈퇴'도 역시 다른 기능들과 동일한 '기능'이다. 회원 탈퇴 페이지 레이아웃 디자인과, 회원 탈퇴에 이르기까지의 와이어프레임 설계, 그리고 개발자의 기능 개발이 모두 필요하다. 즉, 이 사용자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회원 탈퇴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요?


우리가 회원 탈퇴에 대해서 문의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원 탈퇴 방법이 없다고 강한 불만을 제기받은 경험도 있다. 그때, 우리 조직에서는 회원 탈퇴 페이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나는 회원 탈퇴 페이지를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내가 이 부정적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기 위한 조직의 자원은 한정적이다.
· 탈퇴를 결심한 사용자의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 사용자가 탈퇴를 결심한 시점에서 이미 우리는 그 사람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 것이다. 떠나는 소를 위해 외양간을 고치는게 무슨 의미인가.
· 사용자 탈퇴 요청은 1년에 2회 정도 발생한다. 1회를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내외다. 사용자 탈퇴 기능을 개발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디자이너, 개발자의 공수를 합쳐서 적어도 6시간은 소요되는 일이다.
· 즉, 개발에 투입된 자원 이상의 효과를 내려면, 최소 36명 이상의 탈퇴가 자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속도로라면 18년 후에야 투입 자원의 손익분기를 넘길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능을 개발하지 않고 방치만 한 것은 아니다. 기능을 개발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사용하는 문의 서비스 내에서, "회원 탈퇴"에 대한 요청을 우리가 제공하는 설문조사 폼을 통해서 받도록 수정해두었다. 개발 조직이나 그래픽 디자이너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회원 탈퇴"가 불가능하지는 않도록 만든 것이다.


갈 때 가시더라도 저희 서비스를 이용해주세요...



자주 사용하는 명함 관리 애플리케이션 "리멤버"에는 최근 커뮤니티 기능이 추가됐다. 나는 주로 CEO/법인 대표 커뮤니티를 눈팅하는데, 많은 경영자 분들이 조직원들이 경영자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돈을 받는 사람과 돈을 쓰는 사람은 보는 각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 보는 시야가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조직의 기획자/디자이너가 생각하는 UX와 경영자가 생각하는 UX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사용자 경험은 다양한 각도로 고민되면, 다양한 각도로 고민될수록 좋다. 경영자는 그래픽 디자인도, 인터렉션 디자인도, 그리고 개발에 대한 이해도 공부할 수 있지만, 경영진이 아닌 조직원들이 회사의 경영 상태를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경영자도 UX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현실적인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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