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제품 기획자와 개발자에게 고함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로백'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제로백은 정지 상태, 즉 시속 0km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데, 자동차의 성능을 알아볼 수 있는 지표로 많이 사용된다. 제로백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엔진의 성능이다. 즉, '제로백'이 짧은 자동차의 엔진은 좋은 엔진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좋은 엔진을 사용했음이 곧 좋은 자동차를 말하는가? 혹은 좋은 엔진을 사용하면, 좋은 자동차일 가능성이 높아지는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술을 갖추고 있는 것과 좋은 제품 혹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좋은 기술의 기준과 좋은 제품의 기준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읽어볼 만합니다:
· 제품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기획자/개발자
· 무조건 최신 기술을 도입하고 싶은 기획자/개발자
· 서비스 기획자 꿈나무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보았다. 아이들이 타고 다니는 '키즈카'의 모터를 개조해서, 시속 3km 수준으로 달리는 아이들의 자동차를 시속 20km에 육박하는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글의 댓글에는 방법을 묻는 질문이 잔뜩 쌓여있었다.
키즈카는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진 제품이며, 키즈카의 사용자는 누구일까? 성인이 페달을 밟는 자전거에 육박하는 속도로 달리는 '키즈카'를 아이들의 장난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없지만, 만약 내가 아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속 20km로 달리는 자동차에 네 살짜리 아이를 앉히지는 않을 것이다.
엔진은 키즈카를 구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기는 하지만, 키즈카에 들어가는 엔진 기술이 현존 최고 기술일 필요는 없다. 키즈카를 달리게 하는 엔진 기술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시속 3km 정도에서 높은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 정도면 충분하다. 키즈카에 좋은 엔진으로 유명한 테슬라의 엔진을 넣어서 시속 150km, 시속 200km를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키즈카의 사용 목적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서비스의 목적을 망각한 과잉 기술은 오히려 제품성을 떨어뜨릴 수 있으며, 제품의 목적을 완전히 잃게 될 수도 있다.
기술의 종류는 테슬라 엔진처럼 하드웨어 기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드웨어 기술은 물질세계에 존속되기 때문에, 과잉된 기술이 제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기 쉽다. 하지만, 서비스 목적에 과잉된 소프트웨어 기술도 키즈카에 테슬라 엔진을 부착하는 것과 같다. 좋은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서 좋은 서비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6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놀이 '체스'와 20세기 말에 개발된 게임 '스트리트파이터'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게임은 공통적으로 두 사람이 대결하는 구도를 갖는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며, 운이 전혀 작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따라 승부가 결정 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과 컴퓨터가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6년,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딥블루는 당시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에게 정식 대국에서 최초로 승리하였다. 2016년,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는 수많은 기록을 갖고 있는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에게 정식 대국에서 최초로 승리하였다. 이들 인공지능의 승리 이후, 인간이 체스와 바둑에서 컴퓨터를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게임 <스트리트파이터 2>의 인기에 힘입은 후속작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X>에는 전설과 같은 캐릭터가 존재했다. 최종 보스인 베가를 만날 때까지 어려운 조건을 만족하면 숨겨진 보스인 고우키가 등장했었다. 당시 플레이어가 히든 보스인 고우키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고우키의 인공지능은 일반적인 인공지능과는 다르게, 사용자의 키 입력값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구성되어 있었으며, 사용하는 기술 또한 이러한 특성과 잘 맞도록 경직이 거의 없는 기술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용자가 고우키를 이기는 방법은 인공지능의 허점을 이용하는 방법뿐이었다.
고우키의 이러한 인공지능이 플레이어에게 납득될 수 있었던 것은, 고우키가 숨겨진 보스였기 때문이다. 숨겨진 보스이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난이도가 납득되었다. 아니, 시스템적으로 아예 이길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스트리트파이터> 시리즈의 인기를 깎아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스트리트파이터>에 등장하는 모든 컴퓨터 인공지능이 고우키의 것과 유사했다면, 장담컨대 스트리트파이터는 전 세계에서 히트한 게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체스와 스트리트파이터를 플레이하는 이유는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재미없는 유흥을 즐기지 않는다. 체스와 스트리트파이터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비슷한 수준의 플레이어를 찾게 된다면 치밀한 수 싸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숙련도가 증가하며, 숙련도로 승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세 살 아이와 게임을 즐기며 게임 본연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서른 살 성인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100% 승리가 보장된 게임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 반대로 100%로 패배할 게임에서 역시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개발자는 마음만 먹으면 플레이어가 이길 수 없는 수준의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플레이스토어에서 다운로드한 인공지능 체스에게서 승리할 수 있다. 오락실에 가서 동전을 넣은 스트리트파이터 게임기에서 컴퓨터에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게임 AI의 존재 이유는 플레이어와 잘 놀아주는 것이지, 무조건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목적을 망각한 게임 AI를 탑재한 게임이 성공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고도화된 개발 수준이 게임의 완성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있어서 기술은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제품이나 서비스에서 기술은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지, 기술 자체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종종 개발자 중심의 팀, 개발에 매몰된 팀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종종 제품에 몰입하다 보면 목적을 잃고 기술 개발에 치우치는 경우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좋은 키즈카를 만들기 위해서 테슬라 수준의 엔진 기술은 필요하지 않다. 성공하는 바둑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알파고 기술은 필요하지 않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고도화된 기술이 아니라, 제공하고자 하는 사용자 경험에 필요한 만큼의 기술이다. 그 이상 투자된 기술은 자원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품의 사용자 경험을 해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뿔이 달린 말을 더 이상 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네 다리가 달린 뱀을 더 이상 뱀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좋은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좋은 제품, 좋은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은 같은 '개발'이라는 서술어를 공유하지만 사실은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좋은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 좋은 기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 덕분에 스타트업은 RND에 수백억 수천억을 투입하는 기업들 사이에서 존속하고, 시장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우리 개발자 혹은 기획자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좋은 기술인가, 아니면 좋은 서비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