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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Sep 19. 2020

당신의 기린이 온전한 기린이 되기 위해서

기획서를 작성할 때, 당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 이유

나는 기린을 좋아한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유로, 기린이 좋다. 사진첩에 잔뜩 저장된 기린 사진과 영상들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다가, 종종 늦게 잠드는 일이 있을 정도다.


방금 위 문장을 읽으며 목이 길고 노란 털을 가진 포유류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내 문장의 의도와는 조금 떨어진 해석을 한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고 이야기 것은 내가 '기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강아지였으니까.


기린(혹은 뚱땡이)과 기린. 내가 기린을 불렀다면, 내가 부른 것은 강아지 기린일까,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기린일까?


기획자는 기획서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어떠한 형태든 공동 작업을 위한 기획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배경지식을 갖고 있으며, 제각각인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기획서를 해석한다.


사실, 나는 모든 작업이 기획자의 기획 의도에 가장 가깝게 진행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기획자가, 사용자 경험 개선을 위한 모든 과정; 그래픽 디자인, 콘텐츠 제작, UI 구성, 서비스 아키텍처 구성 등 모든 작업을 혼자 다 할 수 있으면 된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니, 기획자의 의도는 오롯이 사용자의 경험에 반영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 모든 과정을 혼자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촬영 감독이 조명 감독, 음향 감독 업무까지는 소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촬영 감독이 영화의 주연이자 조연으로서 영화를 찍는 것이 가능한지, 혹은 그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기에, 우리 기획자는 머릿속에 있는 기획들을 온전한 형태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의 기린이 기린이 되기 위해서


기린 이야기를 더 해보자.

이번에야 말로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목이 긴 초식동물 기린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역시 내 의도와는 벗어난 이해이다. 이번에 이야기하려고 하는 기린은 동북아시아 전설에 존재하는 기린이다.

동북아시아 설화에는 청룡이나 주작 같이 다양한 신화적 동물이 등장하는데, 기린 역시 그중 하나이다. 다양한 문헌에 남아 있는 기린의 특징을 요약해보자면 이렇다고 한다:


생김새는 사슴의 몸에 꼬리와 말발굽을 가졌으며, 이마에는 뿔이 달렸다. 등은 다섯 가지 색이 섞여 있으며, 등과 배는 노란색 또는 갈색 빛을 띤다.


1405년, 명나라의 황제 영락제는 지평선 너머의 보물을 찾기 위해 배를 띄워 탐험을 시작했다. 제독 정화가 이끄는 이 함대는 총 7번의 항해 끝에 다양한 보물을 찾아서 명나라 황제에 진상했다고 한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일화는 여기서 시작하는데, 제독 정화의 다섯 번째 여정에서 방문한 현재 소말리아 지역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린을 발견하게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린-노란 털에 머리에 뿔이 있으며, 소의 꼬리를 갖고 있는, 그리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물-을 보았을 때  명나라 보물 원정대의 머릿속에는 분명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전설의 동물 하나가 떠올랐을 것이다.


소말리아 지역의 평원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기린은 배에 태워져 명나라 황제 영락제에게 진상되었다. 기린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신화 속 전설 기린과 동일한 이름인 기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 이후 우리는 600년이 지난 현재까지 기린을 기린이라고 부른다.


영락제가 생각했던 기린(좌)과 실제 진상받은 기린(우). 이렇게 달라서 그런가, 영락제는 기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명나라의 영락제는 제독이 가져온 기린 진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여러 문서를 읽어 보았지만, 거절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현대 사회로 생각한다면, 영락제의 기린 거절은 프로젝트 인수 거절 정도 즈음이 되겠다.


우리 기획자들은 명나라 보물 원정대 일화를 통해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1. 문장과 말로 상상의 무언가를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 모두는 각각의 기준을 갖고 산다. 내 기준으로 작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내 기준으로 가벼운 것이,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무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문장으로 나의 기획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규격을 정확히 해야 한다. 만약 신화적 동물 기린을 묘사하는 소문이, "다리 길이가 반 척 정도이다. 목 길이가 세 척 정도이다."라고 전해졌다면, 우리는 기린을 기린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탐험을 떠나는 제독이 신화적 동물 기린을 묘사한 그림을 갖고 있었더라면 아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린을 기린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 만약 신화적 동물 기린의 동영상이나 사진을 갖고 있었더라면, 우리가 기린을 기린으로 부르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에 그런 기술이 없었을 뿐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사진과 영상으로 만들어서 보여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2. 만약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있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사용자 경험 기획자는 온전히 자신의 아이디어로 기획을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획서를 작성하게 된다. 내 의도가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전해지기 어렵듯이, 다른 사람의 의도가 나한테 온전히 전해지는 것도 어렵다. 만약, 아이디어의 원안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 나의 이해와 원안자의 이해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을 소홀하게 했을 때, 기획자가 맞이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은 '인수 거부'다. 조직과 동료들이 모든 힘을 다해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클라이언트가 기대한 결과물과 다르다는 이유로 인수 거부당했다면, 그 책임의 대부분은 기획자에게 있다. 소말리아에서부터 기린을 배에 태워 중국 본토 역경(현재의 베이징)까지 데려가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화 제독은 노력 끝에 기린을 북경으로 데려갔지만, 황제는 기린을 받아주지 않았다. 만약 황제가 생각하는 기린이 아프리카 초식 동물 기린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면,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고생이었으리라.




당신의 기획서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명나라 때보다 훨씬 진보한 기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영상을 찍고 유튜브에 올린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영상과 사진이 있으면 많은 것을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획서를 쓸 때, 이미지보다는 글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미지를 활용하기는 하지만, 글의 비중이 훨씬 높다. 정확한 기획을 전달하기 위해서 동영상까지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글로 기획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상상과 동일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편하게 기획서를 작성할 수 있다. 물론 편하다고 결과물이 좋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기획자가 생각하는 바를 그리기 위해서 문장으로만 전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내가 우리 조직원들에게, 어떠한 기획 의도를 전달하고자 할 때, 문장으로만 저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야기해줄 때 사용하는 예시가 있다:


먼저 강아지를 단순하게 그려보자. 그리고, 그 강아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은 채 그릴 수 있도록 설명해보자. "먼저 동그라미를 그리세요.", "강아지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요.", "귀를 그리세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점점 내가 그린 강아지와 전혀 다른 형태가 되어가는 강아지 그림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획서가 잘못 쓰였을 때, 어떻게 되는지 경과를 압축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실험이다.


좌측의 강아지를 그리도록 말로 설명 받았을 때, 내가 그린 결과물.


만약 당신이 기획자가 되고자 한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 좋은 문장력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좋은 문장을 작성할 수 있어야 당신의 기획 의도가 온전히 동료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문장만으로 모든 기획 의도를 설명할 수는 없다.


모든 사용자 경험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각 요소를 표현하기 가장 적합한 방법은 각각 다르다. 예컨대, 기획 의도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문장이 좋을 것이고, UI 요소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이미지 파일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랙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면, 동영상이 좋을 것이다.


좋은 기획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기린이 기린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내 의도를 전달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색해야 한다. 처음에는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서비스 기획 혹은 제품 기획 프레임워크들을 참고하여 기획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해도 좋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일러스트레이터를 익히고, 동영상 편집 도구를 하나쯤 익혀두자. 그것만으로도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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