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를 하지 않는 제품 개발은 도박과 다름없다.
매일 수많은 서비스들이 새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많은 수의 서비스들이 사라진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서비스들이 사라질 때는 그러려니 하지만, 제법 유명한 서비스들이 사라지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주 큰 기업들의 서비스도 어느샌가 사라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왜 사라지는 걸까? 어차피 없앨 서비스를 그들은 왜 만들었을까?
서비스를 종료하는 기업이 구글과 같은 대기업이라면 어느 정도 비용을 감수하고 넘어갈 수 있다. 물론 담당자는 책임을 져야겠지만, 서비스 하나의 실패가 회사의 존망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비스를 종료하는 기업이 스타트업이라면 어떨까? 곧 기업의 존폐가 결정된다. 어쨌든 큰 기업에게도 작은 기업에게도 열심히 만들던 서비스를 폐쇄하는 것은 달가운 일이 될 수 없다.
누군가 서비스를 만들었다면, 분명히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계산기를 두들겨보았던, 좋은 꿈을 꾸었던 어떠한 이유에서든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제품화된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서비스들이 실패하는 것일까? 덩치가 큰 기업들은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지만, 하나의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벤처 기업들의 실패 사례를 보면 멍에의 1위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벤처 기업이 망하는, 그러니까 서비스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순위를 확인해보면, 비단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고객 무시'와 '변화 실패', 그리고 '마케팅 부족'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많은 기업들이 눈물을 흘린 이 이유들이 사실은 한 가지 원인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고객 조사, 시장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시장이 원하지 않는 서비스를 만들면, 서비스가 망해야지 왜 회사가 망하는가? 사실 회사가 망하는 이유는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에 잘못된 확신을 가지면, 그리고 그 잘못된 확신에 풀 배팅하면 회사는 망한다. 대기업이 기회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이유는 확신을 가졌더라도, 회사가 모든 자원을 가져다 붓기 전에 그 확신을 회수할 수 있는 프로세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원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방법, 적어도 잘못된 서비스를 만들고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밖에 없다. 시장 조사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포커를 치면서 돈은 언제 잃고 망하게 될까? 운이 없어서? 혹은 상대가 사기를 쳐서? 둘 다 아니다. 포커를 치면서 돈을 잃으려면, ①잘못된 판단에 ②확신을 갖고 ③올인하면 망한다. 영화 타짜를 생각해보자. 내기 도박에서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굳이 상대에게 좋은 패를 쥐어주었다. 잘못된 판단에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올인하지 않을 거니까. 파멸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포커를 즐기는 편이다. 포커의 여러 종류 중에 홀덤을 가장 좋아한다. 합리적 가치 판단을 최우선 한다고 홍보하는 내가 포커를 즐긴다고 하면 일부 사람들은 의아해하지만, 포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인다. 포커에는 프로가 존재한다. 실제로 프로들이 일반인들과 게임하면 압도적인 차이를 벌릴 수 있다.
프로 갬블러는 단순히 운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개된 정보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승률을 계산하면서 게임에 임한다. 프로 갬블러는 ①내 핸드의 정보, ②공개된 카드의 정보, ③상대 플레이어의 행동 양식을 관찰(리서치)하고 가치 판단하여 승률을 높인다. 그렇기에 일반인이 프로 갬블러를 우연히 한 게임 이길 수는 있어도, 게임을 반복하다 보면 승률은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
·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카드 정보
· 보드에 공개된 카드 정보
· 상대가 손에 들고 있을 것이라고 카드의 가능성
· 상대의 표정, 몸짓
· 지금까지 상대의 행동 양식
프로 갬블러들은 승률을 높여가기 위해서 철저히 연구하고, 순간순간 가치판단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받는 '도박'이라는 인식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프로 갬블러를 '도박꾼'으로 취급하려면 그전에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의하는 도박의 정의를 확인해봐야 한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도박'에 대해서 '재물을 걸고 우연에 의하여 재물의 득실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프로 갬블러들이 가치 판단하는 과정을 보면 그들이 과연 '우연에 의하여' 재물의 득실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헌법에서는 '다소라도 우연성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되는 때는 도박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로 갬블러들은 자신의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 최대한의 리서치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제품/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만약 우리 제품/서비스를 기획함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든 리서치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벤처 기업이 망하지 않는 1순위 원인인 시장이 원하는 제품과 괴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커에서 상대방의 패를 읽고, 행동을 유추하는 것이 100%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제품 기획 단계에서 리서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리서치는 결코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리서치 수행 결과가 100% 성공을 보장해준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은 리서치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리서치를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는, 리서치가 다른 한 가지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리서치는 예정된 큰 실패를 100%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벤처 기업이 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에는 '변화 실패'가 존재한다. 변화에 실패해서 기업이 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변화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기업이 변화에 실패해서 망했다는 것은 변화해야 한다고 인지했으나, 그 시점에서 변화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할 수 있는 여력은 왜 남지 않았을까? 잘못된 서비스에 올인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포커 게임에서는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색상의 2와 7을 들고 시작하는 것을 최악의 핸드라고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2와 7은 대체로 그 어떠한 가능성도 열려있지 않은 이길 가능성이 가장 적은 카드 패이다. 그런데, 2와 7을 들고 시작하는 것은 이길 가능성은 적지만, 절대 망하지 않는 패이기도 하다. 승리 가능성이 낮은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승부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포커 게임은 '폴드'라는 형태로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탈출할 수 있다. 포커에서는 서로가 가진 패를 공개하기 전까지는 언제든 폴드하고 추가 기용 비용 지출을 방어할 수 있다. 처음에 확신을 갖고 배팅에 나섰다가도, 추가 공개된 패로 인해 내 승률이 낮아졌다고 판단되면 지금까지 배팅한 금액까지만 손해보고 게임에서 탈출할 수 있다.
대기업들이 서비스를 종료하는 이유도 유사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비스를 기획하고 개발할 때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시장의 변화를 확인하면서, 더 이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혹은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수익이 미미할 것으로 판단되면 서비스 종료를 선언한다. 서비스 종료를 선언함으로 추가로 들어가는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시장을 관측하다가,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 시장이 원하는 제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다면 '폴드'를 고려해야 한다. 만약 시장에서 탈출할 기회를 놓친다면, 망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회사가 될 수 있다. 회사가 존속되면, 다른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만들어진 제품을 시장이 원하는 형태로 변경할 수 있다. 하지만, 회사가 망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 제품/서비스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시장 조사를 수행해야 한다.
· 시장은 계속 변화한다. 제품을 출시했다고 하더라도, 주기적으로 시장 조사를 수행해야 한다.
· 우리 제품/서비스를 고객이 원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바로 변화해야 한다.
· 서비스 종료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도 서비스를 종료한다.
리서치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리서치는 굳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만약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쉽게 고객을 만나러 나가보면 된다. 말이 거창해서 리서치이지 현상을 잘 관측해내는 것도 충분히 좋은 리서치 방법 중 하나이다. 제품을 기획하는 단계라면, 우리 제품을 사용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우리랑 유사한 제품을 보는 것도 모두다 좋은 리서치가 될 수 있다. 실제 제품이 존재하는 단계라면, 고객을 만나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리서치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가치 판단을 위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