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나갔다고 감정까지 없던 건 아니야
이직이 확정된 후 매니저에게 퇴사를 이야기했다. "퇴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니 "진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진짜지 가짜겠니'라고 부글부글 생각하며 2주 뒤로 퇴사일을 지정했다. 그는 딱히 붙잡지 않았다. "원래 같으면 붙잡는 사람이 아닌데..."라고 말끝을 흐리는 게 전부였다. 나는 이 대화를 끝으로 최악이었던 회사와의 관계를 나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오산이었다.
친한 동료들끼리 이 회사에선 미래가 없다며 이직 준비를 꾸준히 해오다 차장님 한 분이 먼저 환승 이직에 성공했다. 나는 그 몇 주 뒤 지금 회사에서 최종 연락을 받아 남은 연차와 쉬는 기간을 고려하여 퇴사일을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차장님과 같은 날이었다. 이 날 후로 오만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국 지사장인 내 매니저가 차장님에게 '네가 물을 흐려놨다'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실제로는 충격적이게 심한 말이었으나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라 순화했다). 그 분과 나의 이간질이 목적이었던 것인지 두 사람이 나간다고 하니 뿔딱지가 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까지 없는 정마저 탈탈 털어주는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 두 번 했느냐? 그럴 리가. 그는 차장님을 마주칠 때마다 그 말을 했다. 나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는 것 같아 결국 사과도 여러 번 했다. 그분도 화가 나 나중에는 "내가 (글쓴이) 이직시켰나요?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몰랐네요."라고 반응하기에 이르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퇴사 소식을 듣고 아쉬웠던 다른 분들이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그때 들었던 말 중 하나는 그동안 내 매니저가 나는 '절대 이직할 수 없는 직원'이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경력이 없으니 이직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다며, 그만큼 내가 하는 일을 무시하고, 나를 어떤 일을 시켜도 그만두지 못할 절실한 사람으로 취급했다는 말에 정말 분노가 차올랐다. 아, 그래서 나에게 그런 대우를 했구나.
그저 이직이 확정된 오퍼레터를 받고 퇴사의 의사만 전달하면 끝일 줄 알았다. 약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갖가지로 괴롭혔던 이 회사를 감히 우습게 본 것이냐며 비웃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미운 정이라고, 좋은 감정을 가지고 나가려던 내 선한 의지를 후려 갈기는 것 같았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만둘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마지막에 뭐라고 이야기하며 나올지, 그들의 반응은 어떨지 상상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이 모든 일들을 묻어둔 채 조용히 짐을 챙겨 나왔다. 차라리 더 다닐 생각이라면 이야기하고 그만둘 거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조용히 나오라는 인생 선배들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해도 어차피 나갈 사람인 나만 이상한 취급을 받을 것이고 말하지 않아야 서서히 조용히 그렇게 침몰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아름답지 못하게 2년 9개월의 첫 직장 생활이 끝났다. 나름대로 지옥 같았던 시간을 잘 버텨냈고 천국 같은 새 시작을 바라며 그렇게 조금은 씁쓸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새 회사에서 4개월가량 지난 지금 그곳이 천국이냐 묻는다면 노코멘트 혹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지만...
그래도 잘 버텼다,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