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여름이 아득해지는가 싶더니만 벌써 겨울이 왔네. 은행나무의 잎은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철썩이는 파도와 무릎 위 반바지는 고이 접어두고 바람을 맞이해야 해. 오혁의 소녀를 듣자. 그 노래는 차가운 공기를 만나 증폭했을 때 더 잘 어울리니까. 군고구마, 입김, 귀마개. 겨울을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애틋하게 떠올리게 하는 노래니까.
난 정말 네가 필요해. 겨울엔 특히 더 그래. 밖에 있다가 같이 안으로 들어와도 내 손보다 네 손이 훨씬 더 빨리 따뜻해지잖아. 차가운 손마디 마디를 네 손이 포개 주면 정말 좋거든. 가끔은 너무 좋아서 시간이 멈췄으면 싶어. 보통 손이 따뜻하면 마음이 차갑다는데 너는 손도 따뜻하고 마음도 따뜻해서 나는 널 주신 하나님께 매 번 감사해.
해가 빨리 숨어버린 저녁에 널 만나러 가는 길엔 그런 생각도 했어. 밖은 위험해. 나가기 싫다. 그냥 너랑 같이 살면 좋겠다. 밖으로 안 나가고 돈도 안 쓰고 안전할 텐데.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내려마시고 부드러운 수면 잠옷을 같이 입고서 얘기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내가 그린 그림을 베이지색 천에 커다랗게 인쇄해서 커튼을 만들고, 가끔 거기에 빔 프로젝터를 쏴서 영화를 보는 거야. 그럼 우리는 냉혹한 겨울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바르셀로나는 남쪽에 가까이 있어서 겨울에도 두꺼운 니트 하나만 있으면 그럭저럭 살만하대. 같은 유럽이라도 파리나 런던의 살을 애는 겨울과는 다르다는 거야. 스페인으로 갈까? 거기서 보드 타고 해변에 누워서 햇살 받고 그러면서 살까? 낮잠시간도 따로 있고, 야자수도 있잖아. 츄러스를 잔뜩 먹고 우주에서 제일 맛있다는 크로아상도 베어 물자. 유쾌하면서도 단순한 우리랑 잘 어울리는 나라야, 거기.
그냥 같이 살면 좋겠다. 작은 집에서 보일러를 왕창 틀어서 몸을 데운 다음 히히덕거리는 거야. 바닥에 누워서 귤을 까먹고 낮잠 자고 책도 읽고 그러는 거야. 천국은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다는데 나는 왠지 그때가 천국일 거 같아. 그다음 달엔 난방비가 폭탄 맞은 것처럼 나오겠지. 음, 생각해보니 정말 이 땅엔 없겠다, 천국. 돈을 아껴야 하니까 전기장판을 사자. 그리고선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는 거야. 작은 네모 안에서도 우린 행복할 수 있잖아. 눈을 맞추고 너의 귀에 속삭이고 손장난을 치면서.
난 겨울이 되면 몸이 쪼그라들면서 마음가짐도 의존적으로 변해버려. 그래서 껌딱지처럼 너를 따라다닐 거야. 네가 공부할 때 난 옆에서 글을 쓸게. 네 공부가 끝나지 않으면 그림도 그리면서 잘 기다릴 거야. 네가 주방을 잔뜩 어지럽힌 채 감자수프를 만들면 같이 한 그릇 개운하게 비우고 설거지를 할게. 뽀득뽀득 식기를 닦고 아이 손 시려하면서 너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간지럽혀야지. 꿈틀대는 네가 귀여워서 갈비뼈가 움츠러들 만큼 세게 껴안고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상상만 해도 눈물이 핑 돌아. 너무 좋아서.
사랑해. 사랑해. 오늘이 너무 혹독하게 추워서, 너의 얼은 귀를 만져주면서 이런 상상을 잠깐 해봤어. 겨울의 초입에 함께해서 좋다, 무기력한 어둠 속 난로 같은 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