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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책 읽어요?

by 윤지영



“예전부터 활자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나는 일부만 그런 줄 알았거든. 그런데 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텍스트보다는 이미지나 영상의 시대라면서 메시지를 전하려면 초반부터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켜야 하는데 글은 그 기능을 잘 못한대. 긴 글일수록 사람들이 외면한대. 서점이 죽어가고 있는 게 그 증거라고 하더라. 요즘은 아무도 긴 글을 읽지 않는대.



내가 전날 영화를 봤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 영화 어떠냐고 물어보지만, 내가 이번 주에 이런 책을 읽었어요 하면 아무도 그 책은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아. '책 많이 읽으면 좋지'라고 다들 말하긴 하는데, 막상 ‘이런 책을 읽고 있어요’ 하면 거기서 그 주제로는 대화가 종결돼. 내가 비주류의 취미를 가진 걸까? 책 읽을 시간을 마련하는 내가 미련한 건 아닐까? 오히려 그 시간에 업무에 도움이 되는 액셀 학원이나 다니는 게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걸까?






그치만 말이야. 아침 출근길에 펼친 장편소설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는 그런 사람인데 나는. 사실은 회사 도착해서도 책을 마저 읽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일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책장을 펼치고 싶었어. 젊은 작가상까지 수상했다는 그 소설은 그 날 칼퇴의 이유가 되기도 했거든. 주인공이 감당해낸 인생이 어찌나 내 얘기 같던지, 캐캐 묵은 냄새가 나는 지하철에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데, 사회에 적응하느라 메말라버린 정서를 다시 말랑하게 만들어 주더라. 여러모로 날 사로잡았지. 그 책, 성공한 거야 정말.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운명과도 같아. 마음의 온도와 꼭 맞는 책을 만나면,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부터 마지막 장을 닫을 때까지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잖아. 이야기의 주인공과, 배경이 되는 그 시대와, 충돌하는 어떤 사상과 말이야.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작가와는 이 부분에서 동의하지만 전체를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열띠게 토론하고, 인간의 자아정체성에 대해 미스터리 하게 풀어내는 작가에게는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고 책 끝을 붙잡기도 하면서. 남녀가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글을 읽는 건. 작가도 시간과 감정을 쏟지만 독자도 그 감정에 몰입하는 거니까.



근데 이게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걸까? 이렇게 좋은 걸 나만 알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야 하는데 가끔은 초라한 느낌마저 들 때도 있어. 책 읽어서 뭐하냐.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졌냐 하는 마음이 자꾸만 들어.





돈을 벌어서 처음으로 산 가구가 책상하고 책꽂이 었어. 하나하나 나사를 조립하고 완성해 꼭 알맞은 자리에 두었어. 그 두 가지가 어릴 적부터 내 로망이었잖아. 읽고 쓰는 행위를 하는 곳. 비록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적긴 하지만 나한테는 상징적인 의미인 거야. 지영아. 나는 네 문학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방에 침대가 없을지언정 너에게 책상과 책꽂이를 선물한다. 내가 나에게 문학을 사유할 보금자리를 준거거든.



나는 읽는 행위만으로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데 이런 내가 조금 멍청한 거 같기도 하다. 근데 또, 책이 주는 위로나 성찰을 나 혼자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하거나 이렇게 글로 남겨놓으면 난 또 하루치의 행복을 얻은 거니까 그냥 이대로도 좋은 건가 싶기도 하고. 모르겠어. 모든 소설의 결론이 명확한 건 아닌 것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결론도 이렇게나 명확하지가 않다.”






*칼퇴의 이유가 되어주고, 캐캐 묵은 지하철에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 책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었습니다. 90년생 지영이가 82년생 지영이를 이해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좋은 책이었어요. 긴 글을 읽지 못하는 분들도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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