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린다. 거실에 깔린 카페트에도 이케아에서 구매한 하늘색 의자에도 차곡차곡 쌓인다. 서재의 온색 조명을 켜봐도 소용없다. 공간의 모든 것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엄지손톱마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남편과 다툴 때면 늘 주변이 얼어붙는다. 오늘은 어떤 이유였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토록 차가워진 것은.
우리는 연애시절 싸운 횟수가 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에 결혼해도 싸우지 않을 줄 알았다. 정확하게 오산이었다. 풋내기 부부는 설거지를 미루다 싸우고, 티비 시청 시간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다 다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정말 칼싸움처럼 살벌할 때도 있었다. 종국에는 왜 싸웠는지 원인은 까먹고 미움과 상처만 남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화해하고 나서야 내가 마음먹은 미움에 화들짝 놀라지만 당시에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나도 내 마음이 제어가 잘 안된다.
친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는 전쟁처럼 싸워도 마냥 따뜻한 포유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침대에 누워도 등골이 서릴 만큼 차가운 파충류 같은 사람도 있다고. 그런 기운은 푸근한 살집이나 매서운 눈매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 것이다. 그냥 그 사람이 타고나는 속눈썹이나 발의 모양 같은 것.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미래의 내 짝꿍은 따뜻한 포유류 일지, 또는 차가운 파충류 일지 알고 싶어 졌다. 동시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했다.
내가 휘성이랑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그가 몹시 포유류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휘성이가 우는 걸 종종 목격했다. 그는 기도하며 울거나 타인에게 미안해서 울었다. 내가 실수로 한 잘못이나, 혹은 고의로 복수같은걸 저지른데도 그 후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손을 싹싹 빌면 어떤 잘못도 쉽게 용서해줬다. 한마디로 태어나기를 순하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싸우는 와중에도 안절부절 못하며 길을 잃어가는 그의 눈동자를 보면 절로 응어리가 풀렸다. 눈은 영혼의 거울이라는 말을 믿는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그 애의 따뜻함을.
포유류 같은 휘성이가 좋아진 건 어쩌면 내가 파충류과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싸울 때마다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군다. 우리가 맺은 결혼 언약이 꿈처럼 사라질 것 같이. 사실 오늘도 내가 먼저 대화를 끊고 서재로 들어와 버렸다. 내 패턴에 익숙해진 휘성이는 거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티비를 본다. 열린 문 사이로 외화 영화 소리가 들려왔다. 두꺼비집이라도 고장 나서 그가 재밌어하는 영화가 더 이상 방영되지 않기를 조금 바랐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얼마 후 내가 있는 서재로 휘성이가 들어왔다. 뭐라 뭐라 하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길래 대꾸하지 않았다. 실은 마음속으로 매번 먼저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결혼 잘했다고 생각했으면서. 내일도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으면서. 그 후로도 휘성이는 두어 번 더 말을 걸어왔다. 의자에 앉아있는 내게 다가와 자신의 배를 가져다 댄다. 내가 미안하니 너도 그만 풀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비언어적인 소통을 취할 때마다 그가 커다란 대형견 같이 느껴진다. 귀여워서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아직 풀기 싫어서 입술을 꾹 물어잠궜다.
자정이 가까워오고,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는 휘성이는 화해를 포기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평소 그는 머리를 대면 1초 만에 잠드는데 싸운 날이면 그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나는 혼자서 이렇게 오들오들 떠는데 본인 혼자서 세상 꿀잠을 자다니. 복수하고 싶다. 한 소리 하려 방으로 들어갔다.
아기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는 휘성이가 내 자리 쪽에 온수매트를 켜놓은 것이 보인다. 작은 무드등도 켜놓은 채로. 내가 잔업이 남아 늦을 때마다 휘성이는 늘 침실을 이렇게 해두고 먼저 자곤 했다. 여전히 순도 백퍼센트로 따뜻한 이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 결국 오늘도 서리를 내리게 한 사람은 나다. 싸우지 않는 부부는 없고 잘 화해하는 부부만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나는 도무지 잘 화해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다만 휘성이와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만 든다. 그가 있던 자리는 여전히 온기가 돈다. 뜨끈하게 데워진 침대에 누우며, 내 손톱의 퍼런 기운도 서서히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