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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책 읽기

독서, 하나의 세상

by 윤지영


1.

알라딘 중고서점을 좋아한다. 잘 찾으면 새것 같이 상태 좋은 책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하니 친구가 추천해준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이었다. 제목은 ‘소금’. 마침 동네 알라딘 서점에 재고가 있길래 바로 결제를 했다. 책 디자인이 참 예쁜 소금을 한쪽 팔에 상장처럼 끼고 집에 도착해 첫 장을 펼쳤더랬다.



중고서적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 주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번에는 첫 장부터 의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홍순기 님, 2014, 가을, 박범신



다름이 아닌 남의 이름이 적힌 좋아하는 작가의 친필 사인 말이다. 값을 지불했는데도 만난 적 없는 이름 석 자를 마주치니 왜인지 타인의 일상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다음 장으로 넘기지 못하고 얼마간 잡념에 잠겼다. 홍순기가 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을 알라딘에 팔아야만 했던 사연은 무엇일까. 용돈이 필요한 자식이 몰래 내다 판 것일까? 소설 속 어느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더 이상 책을 소장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재밌는 경험이다. 그렇게 소설의 첫 줄 보다 홍순기를 위해 사인을 한 박범신 작가의 필체를 먼저 보게 된 나는 얼마간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이내 프롤로그부터 야무지게 읽어 내려갔다. 정적이면서 극적인 그의 글이 좋았다. 머릿속으로 소금의 배경인 서산을 그리고, 주인공을 상징하는 배롱나무를 꿈꾸면서, 가끔 홍순기라는 사람도 궁금해 하면서.



2.

평소에도 나를 잘 따르던 동생이 최근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됐다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책을 무려 5만 원어치나 질렀다면서 귀여운 허세를 부리더니 자신이 일주일 만에 완독한 에세이를 꼭 빌려주겠다면서 손에 쥐어준다. 홍순기 님 사건도 있었고, 원래 첫 장은 정성을 들여서 넘기는 습관에 따라 책을 펼치니,



2016 신원이가 신원이에게 주는 선물



이라는 통통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동생이 빌려준 책은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책 내용보다는 그 애가 노란색 형광펜으로 밑줄 친 부분들이 더 각인이 되었다. 마치 그 문장들만 생명력 있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 같았다.



가장 강렬했던 표시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롯이 너 자신을 맡겨.라는 문장에 마구마구 그려 넣은 느낌표 행렬이었다. 열정의 불길에 휩싸인 다짐을 하면서 밑줄을 쳤을 그 애가 그려졌다. 웃음이 났다. 그 순간 나는 베스트셀러 에세이가 아닌 열정적인 그 애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 애가 나에게 빌려준 책은 단순히 문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애의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이었던 셈이다.



3.

타인의 책을 통해 책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음을 발견한 나는 역발상으로 나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최근 가장 가까이 지내는 그에게 책을 선물하기로 계획했다. 책을 선물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특별한데 내 세계를 들킬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하다. 고전 치고는 전개가 빠르니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그에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선물했다.



데미안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 었었다. 괴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가 싱클레어와 대화를 하면서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자기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야. 우리 자신의 내면에 없는 것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거든.



이라고 말하는 순간 미워하던 타인의 모습에서 나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했었다. 그 후로 타인을 쉽게 미워할 수 없게 되었고 몇 번은 정말 미운 상대방에게서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데미안은 일정 부분 나의 성장에 기여를 한 것이고 이 문장은 기념비 같은 문장이 되었다.



과연 그는 데미안에서 이 문장을 발견할 것인가. 물론 형광펜으로 표시해두진 않았다. 그러나 그 문장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우연 같은 일이 우리 사이에 일어나기를 바랐다. 간절히 염원하면 기적이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마치 싱클레어가 전쟁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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