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적당히 두 탕 뛰기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방송작가-001.jpg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2022년 1월 28일 설날을 앞둔 금요일, 라디도 생방을 무사히 마친 후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을 기념삼아 방송 작가란 어떤 직업인지에 관한 연작을 써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방송작가입니다. 하네 못하네 하며 들락날락거리는 사이 어느덧 7년 차에 접어든 방송작가입니다. 워낙에 입문이 빠른 직종이다보니 7년차라고 해도 갓 서른을 넘긴 경우가 많은데 저는 마흔을 앞두고 있습니다. 남들 중견 작가 되는 나이에 방송작가를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늦게 시작하여 남들보다 더 서러울 일도 많았는데, 또 서럽다고 여기로 저기로 도망까지 다녔으니 방송작가로 성공하기는 글러먹었습니다. 그러나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방송국으로 조용히 기어들어와 지금도 원고를 쓰며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리는 방송작가의 삶은 핸드폰엔 연예인 연락처가 빽빽하고, 잘 나갈 땐 억소리나게 번다는 치열하고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한 번 들이받아? 싶은 순간들을 수백번 참아넘기고 입에는 차마 담을 수 없는 말들을 무신경하게 뇌까리며 원고를 쓰면서도 피디 앞에서는 자본주의 미소를 잃지 않는, 평범한 우리네 프리랜서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방송작가의 생존전략이 아닌, 프리랜서의 생존전략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화려한 방송작가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참다참다 참깨가 되어버린 불우한 방송작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렇게 성질 더러운 사람도, 저렇게 인내심 없는 사람도 먹고 살 수 있구나, 하는 법을 보여주는, 나름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대망의 첫번째 에피소드로, 두 탕 뛰기에 대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1. 프리랜서는 왜 두 탕을 뛰어야 하는가

저는 오늘 해고통보를 받았지만 여전히 저를 방송작가라고 소개합니다. 바로 두 탕을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아직 한 탕이 남았으니 여전히 방송작가라는 것이지요. 계약서를 보니 앞으로 6개월은 더 방송작가라고 말하도 다녀도 되겠습니다.


여기서 첫번 째 프리랜서 생존전략에 대해 말씀드리면,


프리랜서는 언제나 두 탕 이상을 돌려야 한다.

물론 여러분이 이제 막 방송국에 들어온 신입작가라면 2, 3년 정도는 박봉을 받으면서도 한 프로그램에 투신을 해야하겠지만, 그 이후부턴 들어오는 일은 일단 받아야 합니다. 지금 다른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서 안돼요, 라고 쳐내지말고 기존의 프로그램의 업무량을 줄여서라도 두 번째 프로그램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정규직 피디와 카메라 감독을 제외한 제작진 모두는, 언제든 한 순간에 밥줄이 끊길 수 있는 6개월짜리 비정규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방송작가는 고용불안정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연출은 피디가 끌어주고 당겨주는 일이 가능하지만, (물론 그러기 위해선 그의 입 안의 혀처럼 굴어야 하겠지만..) 방송작가는 메인작가라고 하더라도 밑의 작가를 끌어주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당장 본인이 언제든 잘려나갈 수 있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자신의 계약을 건사하기도 바쁩니다.


그래서 왕작가만 믿고 두 손 두 발 다 놓고 있다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을 빨고 있기 십상이다. 물론 프로그램마다 성격이 다르긴 하다. 예능은 작가의 아이템 능력과 섭외력이 핵심이기 때문에 메인 작가의 힘이 세고, 드라마 작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최상위 인기 드라마 작가나 예능 작가의 경우엔 피디 이상의 파워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방송국에서 써줘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다수의 메인 작가들에게 밑의 작가들의 생계를 책임질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물론 작가 생활 초반엔 메인 작가들의 소개가 작가로 자리잡는 데 매우 중요하지만, 소개받는 일의 조건이 썩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속된 말로 가성비 떨어지는 떨거지들을 떨구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도 전에 같이 일하던 메인 작가님으로부터 프로그램을 하나 소개받은 적이 있는데, 한 주에 고료를 30만원 받는 일이었습니. 만일 여러분들이 메인작가에게 간과 쓸개를 다 내줄 것처럼 구는 강아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여러분한테까지 내려오는 일들은 보통 그런 척박한 조건의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런 척박한 일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주워먹으면서 버텨야 하는 것이 방송작가 생활입니다. 그렇게 메인작가를 작은 형님으로, 피디를 큰 형님으로 모시면서 하이에나처럼 비굴하고 비천하게 생존하는 것이 초반에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프리랜서 초반에 힘든 일 안 겪어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신입 방송작가의 생활은 매순간이 참을인자의 연속입니다. 나이 어린 피디 밑에서 예예, 하며 굽신거리는 것은 서러운 일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같은 작가들끼리 더 못되게 구는 일도 허다합니다. 들판의 야생동물처럼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정말 이상한 사람,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아무리 크다한들 생계의 위협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방송작가로 먹고살려면 야생동물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우리 스스로가 들판의 야생동물이 되어야 합니다. 방송 작가들은 아무리 10년 짜리 프로그램을 맡는다고 해도 6개월짜리 고용 계약서를 매번 연장하는 식으로 계약을 합니다. 그것이 작가 표준계약서의 내용입니다. 방송은 천년 만년을 해도, 피디는 환갑까지 월급을 받아도, 작가들은 6개월마다 짤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원고를 써도 피디가 다른 부서로 발령갔다는 이유로 짤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번에 해고 통보를 받은 이유입니다. 몇 년을 일해도 늘 불안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오는 일은 일단 다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의 질은 정규직 피디한테나 중요한 것이고, 프리랜서 작가들에겐 일의 갯수가 중요합니다. 한 프로그램에 영혼을 다 바쳐서 올인하는 것 3년 차까지만 하시고, 그 이후엔 적당히 두 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굴리면서 하셔야 합니다.


작가가 아무리 수명을 갈아, 영혼까지 한스푼 두스푼 털어가며 프로그램에 헌신을 했든 말든 개편이 되는 순간, 혹은 피디가 다른 프로그램으로 가거나 부장으로 승진을 한 순간, 작가는 그저 닭쫓던 개 신세가 됩니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 작가님, 우리 제작진 여러분~ 하고 외치던 인간들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한 프로그램을 혼신을 다해 잘하려고 애쓰지 않길 바랍니다. 적당한 수준으로 두 프로그램을 굴리는 게 훨씬 생존에 유리합니다. 저도 그렇게 오늘 닭쫓던 개가 되며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 단 한 번의 지각 없이, 패널들의 갑질을 혼자 다 받아가며, 속가락이 굽어지도록 원고를 써 드렸건만, 피디 나으리께서 개편 시즌에 맞춰 몰래 다른 프로그램으로 전근 신청을 냈고, 얼마 전 발령이 결정 프리랜서로 구성된 제작팀 전원이 설 연휴를 앞두고 실직을 한게 된 것입니다.


설이라고 갑자기 특집 원고를 부탁해서 밤샘을 해가며 써다 바치느라 몸살이 난 게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집에 계량기가 터진 와중에 다른 작가 대타를 뛰어달라고 해서 생수로 머리를 감고 부랴부랴 출근을 한 게 겨우 한달 전 일이었는데.. 피디는 그때 다른 부서로 전근 신청을 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짐을 싸라면 짐을 싸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규직 피디 외에는 다 일회용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곳, 방송국이 이런 곳입니다. 방송작가가 이렇게 불안정한 직업입니다. 이래서 은행에서도 프리랜서한테 대출을 안 해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한 프로그램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방송작가 생존 전략 No. 1
열심히 한 프로그램만 하지 말고
적당히 두 프로그램을 할 것!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카페나 하나 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