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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Aug 21. 2023

귀농의 꿈을 불살랐습니다

[노파의 글쓰기] 배추재배 기술 강의 후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수감자가 예약한 일정에 따라 엊그제 배추재배 기술을 배우고 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볍씨라는 고양가와지볍씨를 지나면, 내가 지금 전남 구례에 온 것인지 착각하게 하는 농축산물 단지가 하나 나오는데, 샌들 신은 발을 소독약에 푹 적시고 나서야 강의실에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학우분들은 대개 60-70대의 언니 오빠들이었습니다. 조끼는 대도시 농부 오빠들의 머스트잇템이었고 언니들은 아찔한 색깔의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습니다.


출입문 쪽에서는 또 다른 조끼 오빠가 강의 진행 요원에게 펜을 내놓으라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진행 요원 역시 만만치 않게 머리가 하얗고 목소리는 더 큰 탓에 조끼 오빠가 지고 말았습니다.


배추재배 기술을 강의하러 멀리 전주에서 온 강사님은 알고 보니 토마토-고추-가지 박사였습니다. 그러나 농총진흥청에서 같이 출장을 다니던 친구가 배추 박사였기 때문에 배추에 대해서도 많이 안다고 했습니다.


무슨 배추 도사 무 도사도 아니고, 이런 개연성 없는 설명이 어딨나 싶지만, 그곳에 있으면 묘하게 설득당하고 맙니다. 일단 종이 따위 아끼지 않는 토마토-고추-가지 박사님의 대범함에 압도당하기 때문입니다. 화이트칼라 촌놈은 이렇게 종이를 낭비하면 지구가 무너지는 줄 압니다.


토마토 고추 박사님은 종이 따위 아끼지 않습니다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조끼맨 1이 왜 내가 수확한 배추로 김치를 담그니 배추가 무른 거냐? 이게 과연 배추 탓이냐, 소금 탓이냐로 예송논쟁을 시작했고,


이에 질세라 조끼맨 2가 배추씨는 무슨 품종을 사야 하는지, 비료는 뭘 써야 하는지, 일산동구와 일산서구와 파주시로 딱딱 나눠서 설명하라고 윽박질렀고,


그 순간 누군가 퇴비는 '유박'이 좋다고 외치자, 다들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논쟁이 종료됐습니다.


이후 진딧물이 새까맣게 붙은 배춧잎 사진이 나오자 다시 조끼맨 1이, 저건 소금으로 절이면 깨끗해지니깐 그냥 먹으면 된다고 했으나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고,


다른 조끼맨은 배추 다 뜯어 먹는 달팽이는 대체 어떻게 잡는 건지, 방법을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윽박질렀으며,


그 와중에 머리가 저보다 긴 어떤 중년 남성이 아예 방향을 제 쪽으로 하고 계속 저를 쳐다보기에 일찍 집에 갔습니다. 특이점을 넘어간 사람하고는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는 늘 4, 5년 쯤 뒤엔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였으나, 오늘 강의를 통해 나 따위 유약한 인간은 감히 그런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저 베란다에 파프리카와 방울토마토나 심으며 주제에 맞게 살아야겠습니다.

저 따위 심약한 인간이 무슨 시골살이를 하겠다고..

오늘의 베란다 전리품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186809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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