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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Oct 14. 2023

결국 편집자님과 싸웠습니다

[노파의 글쓰기] 삭제된 똥구멍과 마지막 퇴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책이 나오려면 최종 원고를 보낸 후로도 몇 차례의 퇴고 과정을 더 거쳐야 합니다. 편집자의 검토 의견을 반영해 첫 번째 퇴고를 하고, 교열 전문가가 검수한 원고를 받아 두 번째 퇴고를 하고, pdf로 나온 출판 본으로 세 번째 퇴고를 한 후, 마지막으로 편집자가 한 번 더 검토한 내용으로 네 번째 퇴고를 합니다.

보통은 교열 전문가가 검수하는 단계, 그러니깐 두 번째 퇴고 단계에서 웬만하면 원고를 털어냅니다. 이쯤 되면 이미 있는 힘 없는 힘, 다 쥐어 짜내어 무척 지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질질 짰던 날도 이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퇴고부터는 한글 파일이 아니라 PDF로 작업을 해야 해서 일이 더 번거로워집니다. 제가 일일이 주석을 달아 퇴고 내용을 적으면,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그 내용을 하나하나 파일에 반영해야 합니다. 당연히 퇴고 내용이 많으면 여러 사람이 괴로워집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제가 좀 열렬하게 퇴고를 했습니다. 무려 804개의 주석이 달리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추석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천 개가 넘었으나 연휴가 길어도 너무 긴 덕에 퇴고를 한 번 더 하여 804개로 줄은 겁니다.


다른 분들께 미안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편집자님도 울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을 겁니다. 문장이 더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울면서 자신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싸우고 말았습니다.

전화로 무려 50분이나 맹렬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바로 이 두 개의 이모티콘 (ツ), :) 때문입니다.


우리 편집자님은 정통 문학인입니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해서 출판사에 들어가 10년 넘게 경력을 쌓으며 올바른 글, 규격에 맞는 글을 만들어왔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사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년 정도 방송국에서 구르면서 재밌는 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구성의 글을 써왔습니다. 한 마디로 어그로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만 보셔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낚시꾼인 겁니다.


때문에 정통 문학인의 눈에서 보면, 저는 좀 천박합니다. 반면 제 입장에서는는 그들이 좀, 고루해 보입니다.


그래서 편집자님의 고루함과 저의 천박함이 접점을 이루는 지점에서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꽤나 매력적인 글을 만들었습니다...만, 제가 책 두 군데에 쓴, 이 두 녀석 (ツ), :) 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규격을 갖춘 글쓰기 책이기 때문에 이 두 이모티콘이 독자들에게 훨씬 친근함을 줄 거라고 주장했고, 편집자님은 에세이도 아니고 글쓰기 책에, 그런 걸(차마 이모티콘이라고 지칭하지도 못했습니다) 싣는 경우는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우리가 물러서지 않고 말의 혈투를 벌인 이 50분의 시간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악셀과 그 고양이


남자 주인공 악셀은 유명한 그림책 작가로, 한 영화사에서 악셀의 고양이 캐릭터로 만화영화를 만들기로 합니다. 그런데 영화사에서 말도 안 하고 고양이 캐릭터의 똥구멍을 지운 것을 알게 된 악셀이 아주 진지하 열변을 토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결국 똥을 싸고 토를 하고 섹스를 하는 그런 존재인데, 이 똥구멍은 인간의 바로 그런 육체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인데, 어떻게 그걸 지울 수 있냔 말이냐..


편집자님과 제게 이 이모티콘 (ツ), :)은 악셀의 똥구멍 같은 겁니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남들이 보면 하나도 안 중요한데, 오직 우리 둘만 마치 지구의 미래가 여기에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논리를 동원해 서로를 설득하고, 애걸하고, 간신히 화를 참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이 50분의 맹렬한 대화가, 우리가 이 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내가 쓴 글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든든한 일입니다. 그래서 편집자님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해서 얘 (ツ)는 버리고 얘 :)는 살리는 것으로 잠정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게도 편집자님에게도, 대승적 차원에서 이뤄낸 엄청난 양보였습니다.


나중에 책에서 이 녀석 :)을 발견하시면, 이게 바로 그 대단한 합의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꼭 떠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는 진짜 마지막 퇴고를 하러 갑니다. 이 최후의 퇴고가 끝나면, 이제 어떤 반응이 나오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급하게 쓴 것도 아니고, 힘에 부쳐서 퇴고를 끝까지 못한 것도 아니니, 달리 핑계 댈 것도 없고, 어디 물러설 데도 없습니다. 모든 평가에 그렇군,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흠... 그래도 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군요.


ps. 영화는 정말 좋습니다. 사랑의 끝과 시작, 다시 또 시들어가는 감정의 과정을 현실감있게 보여줍니다. 나이가 드니, 어쩐지 사랑의 끝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좋습니다 :)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232654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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