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서평] 눈물 꽃 소년, 박노해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박노해 작가의 글은 처음 읽어봤습니다. 제가 혁명가니, 노동자니 하는 단어들을 습관처럼 입에 올리긴 해도 실은 노동 문학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문학 중에도 노동 문학의 일인자인 고리키나 체르니솁스키의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동자이기 이전에 예술가라서(B급이지만), 아름답지 않거나 재밌지 않으면 읽는 일이 너무 고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눈물 꽃 소년>은 아름다움과 재미, 둘 다를 잡은 책입니다.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작가님이 한창 혁명가로 호를 날리던 시절, 검사가 법정에서 “서울대 출신도 아닌 사람이 이런 수준 높은 시를 쓸 수 없다”라며 인간의 진위를 의심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드높은 정서를 그리고 있는데, 조금도 읽기 어렵지 않습니다. 정확한 어휘와 매끄러운 문장으로 심장을 파고드는 무언가를 남깁니다.
하루키의 말로 하면 글 안에 “찌르르한 무언가”가 있는 셈인데, 그런 이유로 책을 읽고 나면 인간에 대한 고양감이 절로 생깁니다. 인간이란 동물이 선량하고 드높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어떤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탓에 저는 얼마 전에 한 원로 시인의 시를 읽으며 세운 결심, ‘80년대 이전 출생의 남성 시인이 쓴 책은 읽지 않겠다’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철회해야 했습니다.
이 글에는 강간을 욕망하는 인물도, 자신의 불행을 여성과 아이를 대상화하여 해소하려는 인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은밀하게, 글을 사상의 도구로 활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주인공 “평이”의 시간과 경험을 따라가다 보면, 가난과 야만의 시대에도 사람이 고상하게 설 수 있는 법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당연히 그 검사는 틀렸습니다. 서울대 출신은, 박완서 작가님 외에는, “이런 수준 높은” 글을 쓰지 못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극한 경쟁에서 친구들을 밟고 올라간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정서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의 정서는 주로 평론에 특화돼 있을 뿐입니다.
물론 대단한 평론입니다만, 그들의 시와 소설에는 "찌르르한 무언가"가 없습니다. 시와 소설에서는 이 "찌르르함"이 수준입니다. 수준 높은 글을 읽고 싶으면 "찌르르한" 삶을 산 사람이 쓴 글을 보면 됩니다.
***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아래 세 가지입니다.
1. 엄마와의 이야기
아이의 시선으로 쓴 글이니 엄마와의 일화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시절, 서른다섯의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엄마에게 남겨진 것은 세 마지기의 논과 다섯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늘 바빴습니다. 논일만으로는 아이들 학비를 대기도 벅차 농한기에는 도시의 공장으로 일을 하러 며칠 씩 떠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탓에 엄마는 평이의 운동회날이나 발표회 날은커녕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평이에게 생일잔치를 해준 적도 없고 백일사진이나 돌사진도 찍어주지 못했습니다.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이 달리지 않게 하는 데만도 사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한 번도 평이가 좋은 아들이 되게 해달라고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억울한 일 없게 해달라고, 매일 밤 평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기도했습니다.
“울 엄니와 나는 ‘좋은 부모’도 ‘좋은 자식’도 아니었다. 그저 말없이 곁을 지키며 함께했고 서로를 향해 눈물의 기도를 바쳐줄 뿐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좋은 자식이 되어주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이 되고 나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었다
.... 아, 내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가호자가 있으니. 그 눈물의 기도가 나의 힘, 나의 빛이었으니.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으니.”
이것은 저희 가족이 그 숱한 분란의 역사에도 지금껏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희 가족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끼니를 놓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세상 모든 가족의 화목을 지킬 수 있는 비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해왔는데, 평이의 이야기를 읽고 드물게 제가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보는 눈이 없는 자식이면 또 망할 수도 있는데, 그 이야기는 내일 해드리겠습니다.
요즘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그냥 파삭해진 마음을 어떤 인간적 선의와 다정함으로 촉촉하게 채우고 싶은 분들이라면,
<눈물 꽃 소년>을 적극 추천합니다.
꽤 오랫동안 따뜻할 겁니다.
(<어느 날, 글쓰기가 쉬워졌다>라는 따뜻한 글쓰기 책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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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360399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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