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서평] 김초엽의 <파견자들> & 김보영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두 편의 SF 소설을 읽었습니다.
김초엽 작가의 <파견자들>과 김보영 작가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입니다.
#1. 김초엽과 김보영
김초엽 작가는 이제 웬만한 원로 문인만큼이나 지명도가 있으니 그의 8개월 전 신작 <파견자들>에 대해서는 다들 아실 것 같고, 김보영 작가에 대해서는 낯선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
김보영 작가는 SF계에서는 김초엽 작가보다 훨씬 오래, 더 깊은 영향력을 미쳐온, 원로 SF 소설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SF 작가 최초로 미국 SF 문예지에 단편을 발표했고, 조만간 글로벌 출판사, 하퍼콜린스에서 그의 선집이 나올 거라고 합니다. 이 역시 한국 SF 작가로는 최초라고 합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그 선집에 수록될 소설 중 하나로, 최근 <듄>의 감독, 드니 빌뇌브가 자신의 차기작 원작으로 선택했다고 하여 크게 이슈가 됐습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듄>의 감독이 아닌 시나리오 작가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러든 저러든 이것은 굉장한 소식이기에 저 역시 뭔데? 뭔데? 하면서 봤던 겁니다.
#2. 파견자들
먼저 김초엽 작가의 <파견자들>부터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판본으로 하면 500페이지는 넘을 듯한) 이 무게감 있는 장편 소설에는 ‘범람체’라고 명명된 곰팡이에 잠식당한 지구를 되찾기 위해 인간들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범람체를 악으로, 인간-파견자를 선으로 하는,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 구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선한 인간이 악한 범람체를 몰아내고 지구를 되찾는 뻔한 결말로 치닫지도 않습니다.
곰팡이가 내 뇌에 영향을 미치고, 내 피부를 분해해서 나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존재하게 할 때, 그럼으로써 내가 가진 고유의 개체성을 변화시킬 때, 과연 어디까지를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야기입니다.
“태린의 생애에서 ‘자아’란 흔들린 적 없는 굳건한 개념이었다. 미생물이나 기생충 같은 것들이 인간에게 붙어산다고 해도 그것들이 의식을 갖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것들은 ... 영혼과는 구분되는 외부의 존재일 뿐이다.”
곰팡이로 뒤덮인 지상의 지구와 지하로 밀려난 인간들의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낸 상상력과 리듬감 있게 달려나가는 이야기의 힘은 무척 좋았으나, 지나치게 설명적인 서술과 너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소설적 장치들(임명식에 대신 나간 여자아이, 몰래 복제한 생체 인증칩, 왜 태린의 범람체는 혼자만 다른 선택을 했는가 등)이 좀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태린은, 선오를 제외하면 등장인물 중 유일한 한국인이지만, 말투나 사고방식이 그다지 ‘내 주변의 20대 여자’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인물과 정서적으로 호흡하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3.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파견자들>이 자아와 개체성에 관한 이야기라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시간과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다른 행성을 갔다 오는 여자친구를 마중 나갔다가 궤도가 살짝 엇갈리면서, 그로 인해 지구 시간과 엄청난 시차가 생겨 결국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10년간의 긴 이야기를, 지구 시간으로는 2백 년이 훌쩍 넘는 장구한 시간의 이야기를 고작 백 페이지 남짓한 지면에 헐겁게 쓰고 있는데도 <파견자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훨씬 나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인류사의 가장 오랜 주제, 사랑과 고독과 엇갈림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속으로 여행하는 남자가 지구의 시간이 이미 10년 넘게 흘렀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하는 것은, 예식장에서 예약금을 곱게 환불해 줄 것인가, 세입자는 순순히 방을 빼줄 것인가와 같은 사소하고 현실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고민들이 무척 짠하고 마치 내 일 같아서, 얼른 남자가 지구로 돌아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이 사소하고 성가신 일상을 되찾기를 응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기도 전에 그의 생각과 제 응원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남자는 별다른 해결책도 없이, 한 평짜리 우주 배에 갇힌 채 지독하게 외롭고 비참한 상태로 오랜 시간 우주를 떠돌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떤 경우에도 비장해지지 않습니다.
“(해적선 선장이) 내 편지를 다 봤나 봐. 몸이 욱신거려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그걸 하나하나 다 읽어주더라고. 읽으면서 연신 피식피식 웃는 거야. 요새 드라마 못 봐서 내 편지 듣는 게 낙이라며 몇 장 더 써 달래. 그때 저놈을 없애 버려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머릿속에선 ‘내 수치를 들켰으니 제거해야겠군.’ 같은 대사나 떠오르고 말이지.‘”
남자는 정말 웃깁니다. 너무 웃겨서 꼭 살아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여자를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이 막막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기다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 안에 인간의 지질함, 외로움, 지린내와 함께 시간과 공간과 우주를 전부 담아놓았다니…. 왜 할리우드 녀석들이 김보영 작가의 소설에 눈독을 들이는지 알겠습니다.
#4. 한 권만 쓴 사람의 입
몇 달 전에 스스로를 정통 문학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분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웹소설, 대중 소설. SF 소설 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우리 쪽 사람들은 그런 건 소설로도 안 쳐요.”
그러나 그분이 등단 이후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권의 소설도 더 쓰지 못했다는 걸 상기하면, 역시 저런 말은 한 권만 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한 권만 쓴 사람입니다. 입을 조심해야겠습니다.
그쪽 사람들이(누군진 모르겠지만) 소설로 치든 말든, 이 두 권은 정말 멋진 소설입니다.
내가 좀 지질한 것 같고 시간과 공간이 내 편이 아닌 것 같을 때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읽으시면 됩니다.
내 자아와 개성에 야망과 공존의식과 비장함을 불어넣고 싶을 땐 <파견자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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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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