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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Feb 25. 2024

최근 읽어본 중 가장 농밀한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노파의 글쓰기] 눈물 꽃 소년, 박노해




2. 달콤하거나 살벌한 선생님

책 속에는 다정하고 온정 넘치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60년대 국민학교의 풍경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살벌함과 따뜻함이 공존합니다.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열 살짜리 아이를 교실에서 기절할 때까지 폭행하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아이가 밤늦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켜준 선생님도 있습니다. 


야만과 온정이 함께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동안, 그러니까 지난 몇 달 동안, 이 작고 외진 도서실엔 거진 나 혼자였고, 난 저녁노을에 활자가 가물거릴 때까지 책 속의 다른 세계로 몰입했고, 선생님은 가만가만 발소리를 낮추고 걸어와 내 책상에 등불을 놓아주셨던 것이다. 말할 수 없이 뭉클한 것이 밀려 들어왔다. 난 책을 덮고 일어섰다. 책상 위의 등불을 들고 흔들리는 빛의 길을 걸어 선생님께 갖다 드렸다.


“벌써 다 읽었냐이. 더 보제이.” 

“아니어라, 다 봤어라. 선생님도 얼른 가셔야지라.”


꾸벅 인사를 하고 도서실 문을 나서며 나는 그렇게나 부끄럽고 죄송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매일 자기 돈으로 귀한 초를 사서 켜 놓아주셨고, 나 때문에 퇴근도 안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긴 날들을 그랬던 것이다. 

... 은미한 빛으로 나를 감싸주신 선생님. 은미한 사랑. 은미한 당신.

 


조금 덜 야만적이고 조금은 더 매정한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저는 박노해 작가님의 60년대가 마냥 부럽다고만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생님을 한 분만 만나도, 분명 아이는 평생 이어갈 인간에 대한 신뢰를 내면 깊숙이 새기게 될 겁니다. 


저는 그러지 못하여 인간을 불신하는 어른으로 자랐습니다. 

얄팍한 사랑. 얄팍한 노파. 


3. 녹용팩 사랑 말고 연필 깎아주는 사랑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평이는 영호 때문에 반에서 왕따를 당합니다. 영호는 엄석대 같은 아이로, 다른 아이들은 영호의 눈치를 보느라 평이에게 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힘과 권력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민지는 이런 평이에게 같이 놀자며 먼저 다가온 친구입니다. 60년대 초딩 이름이 민지라니. 이름만으로도 반할 것 같습니다. 하굣길. 엄석대도, 엄석대의 졸개들도 보이지 않을 만큼 학교에서 멀어지면 어김없이 민지가 다가와 말을 겁니다. 

“나랑 같이 놀래?”


평이는 먼저 다가와 주는 민지가 고맙고 좋습니다. 민지도 평이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평이의 부러진 몽당연필을 고르게 깎아주는 것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면 평이는 고르게 깎인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노트에 시를 씁니다. 


평이가 엄마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이 “비밀한 시집”을 민지에게 보여준 후로, 둘은 연필을 깎고 시를 쓰고 읽는 활동을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 정성스럽게 반복합니다. 


얼마 전 목격한 녹용팩 던지기 같은 어른들의 썩은 구애 행위와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입니다.

 

“나는 민지가 깎아준 연필로 또박또박 공책에 시를 써서 민지에게 건네주곤 했다. 그 순간이 환하고 좋았다. 민지는 시 공책을 펴들고 읽다가, 그 희고 가는 손을 가슴에 대고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읽고 먼 곳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그런 민지의 모습이 너무 눈부셔 난 세상을 다 가진 듯 가슴이 설레었다.” 


“깊은 밤 홀로 시를 쓰다가 자꾸만 부러지는 연필을 깎다 보면, 그 애가 사박사박 내게로 걸어왔다. 고개 들어 보면 아무도 없는 정적뿐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서성이던 말이 살아나고, 눈물 속에 외로이 뿌리내렸던 시가 피어났다. 나는 읽어줄 사람 하나 없는 시를 쓰고 또 썼다.” 


쓰고 보니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정확히는, 자신이 사랑받는 줄 아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이는 엄마가 눈물로 기도하는 일이, 선생님이 책상 위에 조용히 등불을 놔주는 일이, 민지가 부러진 연필을 깎아주는 이 모든 일이, 타인이 자신에게 쏟는 사랑임을 압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한 줌의 사랑을 기어이 알아차리는 사람은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에서도 온기를 찾아내어 몸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학교 행사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어도, 선생님이 늦은 밤 나를 쫓아내지 않은 것에서, 짝꿍이 나를 같이 따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사는 일은 더 수월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으니 덜 두렵고, 덜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눈물의 자식"이 안 망하는 것은 아니고, 그 눈물의 기도가 사랑인 걸 아는 자식만이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해도, “이렇게 가난하면서 왜 나를 낳았어요” 하는 자식이 안 망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추가. 음식의 향연


음식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다양해서 읽는 내내 즐겁고 또 배고팠습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어떻게 갯벌이든 산이든 세상 모든 곳에서 식재료를 마련해 훌륭한 한 끼 식사를 만들어내는 것인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

모내기를 앞두고서 동네 일손을 구해 우리 논에 써레질을 하는 날이었다. 


“일손은 잘 멕여야지야. 작은 아들, 오늘 나 좀 도와주시제.”


엄니가 뜨끈한 가마솥에 쌀밥을 안쳐두고 매콤새콤한 서대회 감을 손질해 살강(선반)에 올려두는 사이, 나는 동강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찬 샘물에 담가두고, 갯벌 바닷가 어부네에 가서 갓 잡은 커다란 갯장어 두 마리를 대바구니에 담아 끙끙 이고 왔다. 


“애썼다. 인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그라. 불티 안 날리게 은근히 때야 쓴다이.”

“걱정 마시씨요. 싸릿가지랑 솔잎으로만 곱다시 불 땔께라.”


엄니는 부뚜막 위에 된장 한 그릇, 조선파 한 다발, 어슷이 썬 무, 여린 호박잎이랑 들깨 순이랑 토란 줄기, 절구에 굵게 빻은 고춧가루랑 마늘이랑 생각, 부엌 시루에서 기른 숙주 한 바구니를 가지런히 준비해 두고선 큰 도마를 꺼내 내 다리만큼이나 굵은 갯장어를 다듬고 토막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여인, 평이의 엄니는, 지금의 저보다도 어립니다. 청상과부가 되어 다섯 아이를 건사해야 했던 서른다섯 살 여자의 삶을 생각하니 어머니라는 이름 너머에 묵직한 것이 목 끝에 걸려 말할 수 없이 먹먹해집니다.


이 먹먹하고 아름다운 책을 읽고 나니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번엔 작정하고 사바세계의 끝을 질주하는 드라마를 쓰고 있는데, 제목도 <엄마 말고 누나>이기 때입니다.


만일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서 어떤 인간적인 온기와 애정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눈물 꽃 소년> 덕분입니다.


여러모로 고맙고 훌륭한 책입니다.

많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또 하나의 고맙고 훌륭한 책 <어느 날, 글쓰기가 쉬워졌다>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주시길..)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362757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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