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프리랜서가 4세대 실손보험 들 때 유의사항
보험을 들지 않았다.
보험비로 매년 백만 원씩 내느니 3백 정도를 정기 예금으로 떼 놓고 있다가 병원비가 필요할 때 예금을 깨서 쓰는 게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에 절대 동의할 수 없던 엄마가 나 대신 보험을 들었고 매년 84만 원의 돈이 따박따박 빠져나갔다. 10년이 지나니 금액은 840만 원이 됐고, 12년째엔 천만 원을 넘어섰다.
그 사이 교통사고를 당해 백만 원 정도 혜택을 받았고, 연간 5만 원에서 10만 원 정도 소소한 혜택을 받았다. 나는 병원을 극단적으로 가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합리를 더는 보아 넘길 수 없던 나는 4세대 실손 보험을 들기로 했다. 최소 보장으로 설계했더니 월 8천 원 정도면 됐다.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불안 비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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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프리랜서가 실손 보험에 가입하려면 간호사가 직접 집으로 와서 채혈과 소변 검사를 한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는 매일 밥을 차려 먹는 내 식탁에 앉아, 생전 처음 본 중년 여성에게 팔을 내맡긴 채 피를 뽑혔다.
피부에서 아주 얕은 깊이로 바늘을 찔러넣었을 뿐인데 채혈기 안으로 핏줄기가 솟구치듯이 뿜어져 나왔다. 만년필 굵기의 채혈기를 세 통이나 갈아치우는 동안 핏줄기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 모든 상황이 엄청난 공포였다. 나는 아름다운 정신과 날카로운 의식을 가진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약 3L의 피와 40kg의 뼈와 살로 이뤄진 고깃덩어리였기 때문이다.
대체 이 사이 어디에서 정신과 의식이 발생한 걸까? 저 핏줄기가 형편없이 가늘어지면 내 정신과 의식도 사라져버리는 건가? 그렇다면, 피가 빠져나가는 동안 내 정신의 일부도 빠져나간 것일까? 고만, 고만 가져가라! 안 그래도 정신이 부족한 인간이다, 내 정신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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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피와 정신을 너무 뽑힌 나는 퀭한 눈으로 간호사에게 어제 구워둔 계란 두 알을 챙겨줬다. 그리고 나도 두 알을 먹었다.
알은 곧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간호사를 향해 날아갔고, 그 간호사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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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혈로 정신이 나간 틈을 타 보험사 놈들이 내 왼팔은 2년간 보험 적용이 되지 않을 거라고 알려왔다. 3년 전에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어차피 요즘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이해되지 않으므로 알겠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를 골탕 먹이고 싶다면 2년 안에 내 왼팔을 공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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