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 인간 vs 유랑 인간
해남에 다녀와서 정리할 것들을 정리하고 보내야 할 것들을 보내고 나니 벌써 열흘이 흘러 있었다.
이제야 그 긴 여행이 내게 남긴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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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솔암으로 가는 아스팔트 길에서 열사병으로 뇌가 녹아가던 나를 살린 이장님의 모자 (앞뒤가 헷갈리셨는지 빨간색 마커로 “앞”이라고 써놓으셨다)
2. 우항리 소머리국밥집 사장님이 주신 에코백
3. 해남 터미널에서 택배로 부친 고구마 중 마지막 남은 다섯 알
4. 진도의 혼 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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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적나라한 흔적은 몸에 새겨져 있었다. 남도의 절절 끓는 태양을 피한 자리와 그러지 못한 자리.
종아리의 상처는 달마산에서 길을 잃고 수풀을 마구 해치다 생긴 것이고, 땅끝마을에서 아디다스 모기한테 뜯겨 퉁퉁 부은 상처는 그새 다 아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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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흔은 나의 베란다 텃밭에도 새겨졌다. 식물의 절반 정도를 미리 정리하고 간 탓도 있지만, 첫날 본 모습은 마치 버려진 들판처럼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상태가 안 좋았을 뿐이지, 다들 살아내 주었다. 주인을 닮아 전부 독했다.
가장 상태가 안 좋은 건 레몬나무였다. 나의 부재에 매일 진절머리라도 친 건지, 가지마다 열 개씩 달려 있던 열매는 모두 떨궈졌고, 이파리도 70%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살아 있다. 그럼 됐다.
의외로 강한 녀석은 식충 식물이었다. 뿌리가 약해서 당연히 죽을 줄 알았는데 모두 건강하게 살아남았고, 어떤 녀석은 새끼까지 쳤다. 날파리의 체액으로 수분을 보충한 걸까? 내 반려 식물이 될 자격이 있다.
제일 놀란 건 상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로 싹이 텄길래 알아서 죽으라고 굳이 뽑아내지도 않았는데, 와 보니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자라 있었다.
상추가 원래 이렇게 강한 식물이었나? 이 녀석은 끝까지 키워서 씨까지 받아내야겠다. 넌 후손을 남길 의무가 있어.
깻잎도 물 없는 한 달을 씩씩하게 버텨주었고, 고구만지 콩인지, 내가 심지도 않은 식물도 한 뿌리 자라 있었다. 황당했지만 받아들였다.
원래 한여름엔 진딧물과 응애가 창궐하여 식물을 다 치우려고 했는데, 이 녀석들이라면 응애 따위 다 줘패놓을 것 같아서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주고 빈틈은 대파로 메꿨다.
살아남은 자들의 공간. 네버 다이 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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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내 정신에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새겼는데, 그것은 내가 정주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나는 태양 아래서 끝없이 걸어야 안도하는 인간이었다. 새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걸을 때 가장 행복해지는 동물.
그래서 지금 내가 사는 집을, 아파트를, 도시를 싫어하는 중이다. 싫다는 감정이 들불처럼 일어나 몹시 곤란해하는 중이다.
이봐 진정해, 매일 떠돌 순 없다고.
지금은 정주의 시간.
가만 가만 숨을 고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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