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을 받으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다

이민자의 삶이 알려준 변화의 진짜 의미

by Helen Lee

미국에서 살기 위해 영어는 필수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꼬박꼬박 어학원에 출석하며 영어에 집중했다. 하지만 2년을 보내고 깨달았다. 어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F1 학생 신분으로는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도.


커피숍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었고, 직장을 갖기 위해서는 워킹 퍼밋과 그린카드가 필요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비자 발급이 더 까다로워질 것이라는 말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나는 미국이라는 현실 속으로 직접 뛰어들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안식년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지내요."


남편은 말했지만 환율은 치솟고, 물가와 생활비는 늘어났다. 오전 파트타임으로 일해봐야 얼마나 벌겠냐마는 한국에서 애쓰는 남편의 어깨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일하면서 느낄 수 있는 나라는 사람의 효용성과 가치를 느끼고 싶었다. ‘직장을 가진다’는 목표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간절하게 기다린 그린카드였다. 그래서 영주권을 받으면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바뀔 줄 알았다. 학생 신분을 벗어나면 멈춰 있던 삶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미국에서의 미래가 한눈에 열릴 줄 알았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기대를 이 작은 플라스틱 카드 한 장에 걸어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일상의 무게는 여전히 내 몫이었고,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일도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영주권이 있다고 갑자기 길이 평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불안이 사라졌다.

더 이상 어학원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소셜시큐릿넘버(SSN)를 받고 체이스 은행 신용카드를 만들어 크레딧을 쌓았다. 미국 주식도 샀다. 무엇보다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삶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부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먼저, 한국학교에 이력서를 냈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한국어 교원자격증이 큰 힘이 되었다. 뉴저지 한국학교는 미국에서 시애틀 다음으로 큰 규모의 학교였다. 650명 넘는 학생과 40여 명의 교사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곳. 6학년 담임으로 시작한 첫해는 잊지 못한다. 한국의 6학년과 달리 순둥순둥하고 따뜻한 아이들, 그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에너지가 매주 토요일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토요일 오전 3시간 수업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나는 더 배우고 싶었고, 다음 장을 열고 싶었다. 그래서 근처 대학 한국어과, 퍼블릭 스쿨, 유치원까지 이력서를 보냈다. 연락은 가뭄에 콩나듯이 왔고, 여건이 맞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생명보험 자격증에 도전했다. 시험만 합격하고 실제로 써볼 기회는 없었다. 그다음은 EA(세무사) 자격증. 도전했지만 방향이 아니라고 판단해 회계사 사무실에 이틀 출근하고 빠르게 정리했다. 평생 문자만 보고 살아왔던 내가 선과 숫자, 엑셀이 전부인 세상에서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HHA(홈헬스에이드) 자격증, TESOL 자격증 취득까지. 미국에서의 시간은 끊임없는 ‘시도–실패–재시도’의 연속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영주권을 받은 뒤 1년간의 여정은 나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영주권은 ‘안정된 자리’를 주는 문서가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 선택을 계속해 나가는 중이다.

어쩌면 그게 이민자로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메시지

영주권은 세상을 바꿔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길’을 선택할 자유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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