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이 내 집이라고 왜 말을 못 해!
이사 갈 집을 계약만 해 놓은 상태에서 이 집을 내 집이라 말할 수 있나? 정확히 말하자면 계약금으로 낸 퍼센티지만큼, 즉 그 집의 1/10 정도만 나에게 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중도금, 잔금을 치르기 전까지 집은 내 소유가 아닌 전 주인의 소유인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택을 리모델링(일부 대수선) 하기 위해선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허가를 받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주에서 한 달. 허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미리 집 명의자에게 동의를 받아야 했기에 나는 집주인 할머니에게 공손하게 전화를 드렸다. "어르신, 저예요. 오늘 괜찮으신 시간 알려주시면 제가 동의서 들고 찾아뵐게요."
처음에는 하하호호 웃으며 과일도 깎아 주시고 직접 짠 주스도 내어주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던 동의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늘어나자 조금씩 눈살이 찌푸려지더니 이내 불편한 일이 되고 말았다. "어르신, (또) 저예요. 이번에는 용도 변경 때문에 동의서를 받으러 가야 할 것 같아요." "어르신, 정화조 청소를 일 년에 두 번 진행하겠다는 동의서가 필요해서요.."
이미 팔아버린 집인데 서류 상 아직 집주인인 관계로, 그들이 동의해야 할 서류는 차고 넘쳤고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결국 이럴 거면 그냥 빨리 명의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방법은 단 하나. 잔금을 치르는 것이었다.
아직 아파트도 팔지 못한 상황에서 잔금을 치르려니 똥줄이 바짝바짝 탔다. 이 많은 돈을 어디에서 구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하루하루 피가 말라갔다. (몸은 왜 안 마른 건지 의문)
결론적으로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손을 벌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딸내미가 한마디 상의 없이 덜커덕 계약해버린 주택을 위해 아빠는 땅을 팔고 엄마는 오래된 적금을 깼다. 친오빠도 그간 모아놓은 돈을 송금했고 남동생도 적금 하나를 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부분은 신용대출로 메우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워지지 않은 비용은 신랑이 친구에게 꿔보겠다고 했다. 이게 정말 뭐하는 짓인지.. 살면서 가까운 지인에게 5만원도 꿔본 적이 없던 나는 그의 100배보다 더한 돈을 빌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천만 원이 부족해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친한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집 문제는 잘 해결되고 있는지 묻길래 아무 생각 없이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몇 분 후, 통장에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람이 왔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년아.. 뭐하는 짓이야.." 돈을 꿔준 친구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붓고는 잘 쓰고 곧 갚겠다는 말로 대화를 마쳤다. 같은 엄마로서, 같은 유부녀로서, 같은 주부로서.. 이 돈이 얼마나 귀하고 (비밀스러운) 돈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더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의 잔금일은 다가왔고, 겨우 겨우 마련한 돈을 지불하고 주택은 당당히 우리의 명의가 되었다. 전 주인으로부터 받은 등기 권리증은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두께와 포스를 지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우리가 구매한 주택의 역사가 빛바랜 누런 등기 권리증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77년도에 처음으로 누군가의 집이 되었던 순간부터, 몇 번의 명의 이전을 거쳐 오늘 우리의 집이 되기까지. 소위 말하는 '집문서'에 해당하는 이 서류에 이제는 나와 신랑의 이름을 새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