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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록홈즈 Dec 08. 2021

빨간 점 (3)

그렇게 이웃이 된다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다거나 읍소하며 부탁할 일이 여지껏 없었다. 생사가 걸리는 일 아니고서는 내키지 않으면 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40년 가까이를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일은 조금 달랐다. 계약한 집의 두 평 남짓을 잃는다는 게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니지만 그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읍소를 해서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집을 계약했던 날부터 잘못된 것일까. 애초에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결심한 것부터가 잘못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결국 화살의 촉은 내 자신에게로(사실은 신랑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주택에 대한 꿈만 꾸지 않았더라면. 지금 사는 그대로, 무난하게 사는 삶을 택했더라면.. 이 시대에, 이 시국에, 이웃 간에 오고 가는 정을 기대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엄마 혼자가 아니라 동네가 키운다는 말은 다 개뻥이었어..'

쓴 맛을 보고 나니 그 어떤 것도 달거나 짜거나 시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썼다.


옆 집 사장님과 차 한잔 마시기로 약속을 했다. 어떤 말을, 어떤 행동을 해야 나에게 조금 더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참을 굴리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어떤 시나리오도, 플랜도 부질없다 느껴져 결국 마음을 비우고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나갔다. 손에는 방금 구운 따끈한 스콘 한 박스를 들고..





잘 부탁한다는 뜻의 뇌물이 아니라, 벽 하나를 두고 앞으로 오랜 세월을 보며 지낼 사이이기에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진심을 다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빨간 점을 경계로 담을 쌓기를 원하는 옆 집의 입장도 충분이 이해가 되었고, 집의 중요한 출입구를 잃게 된 우리의 입장도 옆 집에서 충분히 이해를 해주셨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되, 아직 끝마치지 못한 2차 측량은 최대한 빨리 끝내기로 했다. 혹시라도 결과가 다르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마음 한편에 있었다.


A/S 신청을 하고 2차 측량 날짜가 다가왔다. 20센티, 아니 단 5센티라도 조금만 더 우리 집의 면적이 확보되길 바랐다. 이번에는 뒷 집에도 사전에 연락을 해 놓았다. 흔쾌히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동의를 하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측량이 다시 진행됐다. 결과는?


지난번과 똑.같.았.다. 단 1mm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우리나라 기술이 이토록 최첨단이었던가!) 우리가 잃은 2평 남짓의 땅은 뒷 집의 마당에 가 있었다. 우리 땅이니까 돌려달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측량의 결과대로 표시는 해둬야 하니 뒷 집 마당에 들어가 빨간 점을 찍고 말뚝을 박았다. 측량을 하는 내내 죄송한 마음에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엄연히 우리 집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집 하나로 인해 이 동네가 시끄러워지는 것 같아 심장이 조여올만큼 마음이 불편했다.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사과와 감사 인사를 드리다 보니 한분 두 분에게서 따뜻한 말이 들려왔다.





앞집 옆집 뒷집이 오밀조밀 모여있고, 벽끼리 담장끼리 맞닿아있지 않은 집을 찾아보기 힘든 조그만 골목. 이 안에서 니 땅이니 내 땅이니 경계를 나누고 표시하는 일은 나 역시도 바라던 것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서일까. 이웃의 따스한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뭐랄까. 조금은 우리 집이  골목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진 기분이랄까.  맛을 제대로 맛보고 나니 이제야   같다. 쌉싸름한 약을 꿀꺽 삼키고 나면 엄마가  안에  넣어주던 달콤한 사탕처럼, 세상에는  맛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수한 , 다정한 , 따뜻한 , 배려의   골목 안에 살면서 앞으로 느끼게  온갖 맛들이 다시 조금씩 기대가 된다. (빨간맛만  아니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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