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이웃이 된다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다거나 읍소하며 부탁할 일이 여지껏 없었다. 생사가 걸리는 일 아니고서는 내키지 않으면 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40년 가까이를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일은 조금 달랐다. 계약한 집의 두 평 남짓을 잃는다는 게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니지만 그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읍소를 해서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집을 계약했던 날부터 잘못된 것일까. 애초에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결심한 것부터가 잘못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결국 화살의 촉은 내 자신에게로(사실은 신랑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주택에 대한 꿈만 꾸지 않았더라면. 지금 사는 그대로, 무난하게 사는 삶을 택했더라면.. 이 시대에, 이 시국에, 이웃 간에 오고 가는 정을 기대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엄마 혼자가 아니라 동네가 키운다는 말은 다 개뻥이었어..'
쓴 맛을 보고 나니 그 어떤 것도 달거나 짜거나 시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썼다.
옆 집 사장님과 차 한잔 마시기로 약속을 했다. 어떤 말을, 어떤 행동을 해야 나에게 조금 더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참을 굴리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어떤 시나리오도, 플랜도 부질없다 느껴져 결국 마음을 비우고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나갔다. 손에는 방금 구운 따끈한 스콘 한 박스를 들고..
잘 부탁한다는 뜻의 뇌물이 아니라, 벽 하나를 두고 앞으로 오랜 세월을 보며 지낼 사이이기에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진심을 다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빨간 점을 경계로 담을 쌓기를 원하는 옆 집의 입장도 충분이 이해가 되었고, 집의 중요한 출입구를 잃게 된 우리의 입장도 옆 집에서 충분히 이해를 해주셨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되, 아직 끝마치지 못한 2차 측량은 최대한 빨리 끝내기로 했다. 혹시라도 결과가 다르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마음 한편에 있었다.
A/S 신청을 하고 2차 측량 날짜가 다가왔다. 20센티, 아니 단 5센티라도 조금만 더 우리 집의 면적이 확보되길 바랐다. 이번에는 뒷 집에도 사전에 연락을 해 놓았다. 흔쾌히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동의를 하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측량이 다시 진행됐다. 결과는?
지난번과 똑.같.았.다. 단 1mm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우리나라 기술이 이토록 최첨단이었던가!) 우리가 잃은 2평 남짓의 땅은 뒷 집의 마당에 가 있었다. 우리 땅이니까 돌려달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측량의 결과대로 표시는 해둬야 하니 뒷 집 마당에 들어가 빨간 점을 찍고 말뚝을 박았다. 측량을 하는 내내 죄송한 마음에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엄연히 우리 집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집 하나로 인해 이 동네가 시끄러워지는 것 같아 심장이 조여올만큼 마음이 불편했다.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사과와 감사 인사를 드리다 보니 한분 두 분에게서 따뜻한 말이 들려왔다.
앞집 옆집 뒷집이 오밀조밀 모여있고, 벽끼리 담장끼리 맞닿아있지 않은 집을 찾아보기 힘든 조그만 골목. 이 안에서 니 땅이니 내 땅이니 경계를 나누고 표시하는 일은 나 역시도 바라던 것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서일까. 이웃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뭐랄까. 조금은 우리 집이 이 골목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진 기분이랄까. 쓴 맛을 제대로 맛보고 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쌉싸름한 약을 꿀꺽 삼키고 나면 엄마가 입 안에 쏙 넣어주던 달콤한 사탕처럼, 세상에는 쓴 맛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수한 맛, 다정한 맛, 따뜻한 맛, 배려의 맛 등 골목 안에 살면서 앞으로 느끼게 될 온갖 맛들이 다시 조금씩 기대가 된다. (빨간맛만 아니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