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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록홈즈 Apr 26. 2022

다섯 번째 우리 집

집들이여 잘 있거라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한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가 처음이었으니 온전한 나의 첫 집은 12평짜리 작은 신혼집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라는 것을 시작했고 청소, 빨래, 설거지 등 늘 엄마가 해주시던 집안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처음 알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뱃속에 아기를 가진 엄마가 되었다.

유모차 놓을 자리조차 없을 만큼 작았지만 추억이 가득한 그 집. 지금도 신랑과 그 동네를 지나갈 때면 '우리의 첫 집'이라 말하며 향수에 젖곤 한다.


​두 번째 집은 신랑의 이직으로 인해 서울에서 벗어나야 했다. 한적한 마을에 있던 20평대 아파트. 그곳에서 두 아이를 낳았고,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육아에 전념하다가 혼자 꾹꾹 삼키며 버텼던 우울감을 쏟아내기 위해 블로그를 시작했다. 지금도 그 집을 떠올리면 집 곳곳, 동네 곳곳에 서려있던 애정이 다시금 솟아난다.

아이들에겐 나고 자란 고향이라 할 수 있고,

나에겐 매일 밤마다 울고 웃으며 꿈을 키우던 곳이어서 그런 것 같다.


​세 번째 집은 (또다시) 신랑의 이직으로 인해 어렵게 어렵게 인 서울.

아주 오래된 20평대 복도식 아파트에서 복작복작 거리며 2년을 살다가 거의 도망치듯 나왔던 것 같다. 살기 좋은 동네임은 분명했으나 몇몇 동네 엄마들의 교육열에 휩쓸려 내 아이를 닦달하는 내 자신에게 지쳐 그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고 서울 안에서 가장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한적한 지금의 동네를 택했다.


​네 번째 집은 '이런 동네에 아파트가 있었어?'라는 이야기를 매번 들을 만큼 조금 생소한 곳에 위치한 30평대 아파트. (그렇다. 드디어 평수를 30평대로 늘렸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 동네를 택한 것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첫째 아이에게는 규모가 작은 학교가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아이가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에 미술관, 박물관이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영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남들의 방식에 흔들리지 않으며 내 아이들, 우리 가족의 속도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네 번째 집.


​그러다 지금의 다섯 번째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은 4년 넘게 살아온 이 동네의 숨결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매일 밤마다 아이들과 옛날 드라마를 즐겨보곤 했었는데, '응답하라 1988'을 함께 보며 아이들이 골목에서의 삶을 무척 재미있어했다.

아무 생각 없이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골목에서 살아보자.." 하며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었는데 문득 그 '언젠가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어릴 때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넘게 골목 안의 집들을 수색하다가 만나게 된 우리의 다섯 번째 집.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예쁜 골목 안에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45년도 더 된 집. 이곳이 우리의 집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더 이상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아마도 살면서 가장 큰 용기와 가장 무모한 선택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약 100일째 살고 있는 우리의 다섯 번째 집은'큰 용기와 무모했던 선택이 과연 잘한 것이었구나'를 매일 생각하게 할 만큼 더없이 좋다.

벌써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했으며 이제 서서히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미친 듯이 뛰고 집이 떠나갈 듯이 웃으며 날이 좋으면 옥상 데크로 피크닉을 가고 날이 궂으면 안방 창문으로 골목의 전경을 감상한다.





애미 애비는 집을 고치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그릇도 사고 화병도 사고 그림도 사고 가구도 사고 전자제품도 사고 자전거도 사고 사고 사고 또 사면서 돈ㅈㄹ병에 단단히 걸려있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 중이다.




같은 골목에 살고 있는 이웃들은 긴 공사로 인해 처음에는 날이 서 있기도 했었으나 이제는 각자의 옥상에 앉아 인사를 건네거나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주고받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은 피아노까지 받아서 우리 집의 주방이 음악실로 변해버렸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무서워하던 아이들은 매일같이 담벼락에 놀러 오는 고양이를 보며 반가워하고 주인을 잡아끌며 골목을 누비는 강아지들을 귀여워하게 되었다.





40대가 되어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나의 휴대폰에는 아이들 사진보다도 작은 뒷마당에서 피어나는 꽃 사진이 대부분이다. '아휴 이뻐라-' 혼자 계속 중얼거리면서 찰칵찰칵.




우리의 다섯 번째 집은 이렇다.

​사실은 이사 오고 며칠 안됐을 때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온라인 집들이고 뭐고 망했지 싶다.


​기존의 아파트보다 공간이 협소하고 수납공간도 부족하고 안방도 아이들 방도 거실도 주방도 모두 작아져서 그런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짐들이 아직도 많지만 마음은 조금 더 넓어지고 말끔해진 기분이다.


​'​​드나들기 쉬운 집'

​내가 가장 바랐던 우리 집의 모습은

(도둑 빼고) 누구나 드나들기 쉬운 집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더더욱 각박해진 까닭에 언제든 누구든 집에 초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집도 내 마음도 이중 삼중으로 닫고 살던 때보다는 조금씩 여유가 생기길 바라고, 그렇게 변해가는 중인 것 같다.


​지금의 집이

차곡차곡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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