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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Aug 26. 2020

그림을 그려볼까

드로잉이 취미로 부각되면서 드로잉 수업을 신청해보았다. 매주 서울 시내의 골목을 찾아다니며 야외에서 그려보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흰 종이 앞에서 막막했는데 곧 드로잉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출퇴근길에 그려 볼 소재를 탐색하고, 주말이 되면 마음에 드는 풍경을 찾아가 그렸다. 드로잉의 재미와 반대로 직장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좋은 일자리 만들기가 목적인 <함께일하는재단>에 소속되었지만, 정작 나의 신분이 계약직이었다. 신입직원 대부분을 계약직으로 고용하는 상황 속에서 노동조합도 생겼다. 창단식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조합원이 되었다.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설수록 1인 시위와 파업까지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그림만은 꾸준히 그렸다. 출장에 작은 스케치북과 수채화 도구를 챙겨갔고, 파업 중인 일터의 풍경도 그렸다.


그린 그림을 엽서로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노조활동에 사용하였다. 조합 사람들은 나를 '박 화백'으로 불러주었다. 어느새 나는 사내용 홍보 캠페인을 기획하고, 천막에 조형물을 만들고, 전단에 쓰일 일러스트를 그리고, 집회에서 기타 치며 노래도 하였다. 파업에 필요한 종합 예술을 펼쳐 보이면서 사무실에 있던 날들보다 더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이 알 수 없는 밝은 기운을 우리는 ‘명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었지만 싸움은 길어졌다. 2013년 3월 4일 노조원인 나의 계약은 연장되지 못했다. 일 년 동안 내가 일해 온 시간들은 박스 하나에 단출하게 정리되었다. 사무실을 떠나기 전 바라본 책상이 유독 공허해 보였다. 처음은 아니었다. 마음을 내어 일했던 책상이 비어지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비어진 공간이 유독 하얀 공터로 마음에 남았다. 더 이전의 일터에서 책상을 비워주기 전에 따져 물어야 했었던 말들. 이곳에서 노동조합 덕분에 신나게 따져 묻고 화도 낼 수 있었다. 조직에 따져 묻고 있던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질문하였다. 일이 나에게 무엇인지, 일이 가리키는 의미에 계속 마음을 둘 것인지 물었다.


선명한 답은 없었지만 더 이상 빈 책상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든 비워질 수 있는 책상 위에 삶의 의미를 맡길 수 없었다. ‘나의 자리, 나의 테두리’만 생긴다면 삶은 행복할 거라고 믿었지만, 내가 열렬히 얻었다고 생각한 자리는 애초에 텅 빈 공터였다. 하지만 이미 20대의 청춘도 함께 지나가버렸다. 30대까지 청년으로 봐주는 관대한 시대지만, 남은 청춘의 후반전은 무엇으로 보낼 수 있을까. 어떤 것을 삶의 빛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과 직업만이 삶의 목표이자 꿈이라고 배워왔다. 학교를 거쳐오며 늘 진로에 대해 질문받고, 내가 얻을 수 있던 점수로 결정된 진로 위에서 꿈을 찾았다. 일이 없으면 생계 걱정이 피어오르고 사람은 금세 초라해질 수 있다. 일은 분명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다들 경쟁하며 더 좋은 조건의 일을 쟁취하는 이유이다.


기약 없는 취업기간을 끝내고, 의미 있을지 모를 일을 시작하며 그것에 취해서 살았다. 의미에 취해있던 한편에 문득 공허함이 보일 때가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 10대에는 ‘나중에 대학에 가면’, 20대에는 ‘나중에 취직이 되면’ 하며 답을 유예시켰다. 그때가 되면 혹은 뭔가를 성취하면, 혹은 결혼을 하면, 가정을 꾸려보면, 그렇게 나중에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되리라 믿고 넘긴 페이지는 금세 30대가 넘어가 있었다.


일하며 붙인 포스트잇과 수첩들은 그때의 치열함을 담고 있었지만, 언제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리질 수 있는 세계였다. 상자 하나로 단출하게 정리될 수 있는 세계. 그동안 지나온 몇 개의 책상들은 뚝뚝 끊어진 경험으로 남았다. 어디가 어떻게 끊어진지는 흐릿했지만, 일만 믿고 따라가는 것만으로 내 삶은 더 이상 잘 살아지지가 않았다.


그림을 그려보자


처음에는 일 없는 기간 동안 잠깐 그림을 그려보는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책상에서 그림을 그린 시간이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이제는 몇 년이 지났는지 세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30대 초반에 시작한 그림과 함께 어느덧 마흔이다. 단발적인 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화방에서 붓과 종이를 사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돈을 벌어 좋아하는 장르에 투자하는 기쁨이 쏠쏠했다. 미술용품, 미술수업을 듣기 위해 번 돈을 썼다. 지하철에서 힐끔힐끔 사람 그리는 연습을 하고, 누드크로키도 2년 정도 꾸준히 다녔다. 계절이 바뀌는 마디마다 서울숲 부근을 떠돌며 나무와 숲과 자연을 그렸다.

 

어떤 기약 없이 시작된 그림이었다. 나에게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장르가 있다는 기쁨과, 또 언제 어떤 계기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초조함이 함께였다. 다시 직장에 다녀야 하는 사정이 생기면 그림은 할 수 없겠지.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림실력, 그림세계를 갖추고 싶어 졌다. 저 멀리 화가들의 이야기는 초조한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반 고흐, 폴 고갱, 애드워드 호퍼, 이중섭, 박수근 등 화가들의 삶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저 멀리 다른 시간 속에 흔들리는 삶을 살아낸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작품들이,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나보다 먼저 그림을 그렸던 그들의 세월과 빛나는 용기를 믿었다.


일터로의 출근과 퇴근, 주간 계획, 월간계획, 한해 보고서로 짜인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쌓여갔다. 아직도 일상을 직접 책임지는 과정은 불안정하고 때론 혼란스럽다.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사건들도 도래한다. 삶은 그렇게 사건들 틈으로 위태롭게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상 속에서도 그림을 그린다.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힘을 몇 년 동안 작업(창작)에서 탐색해 보고 있다. 조금 확대해서 말하면 사람에게는 작업하는 시간도 필요함을 배우고 있다. 나에게 그림은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언어이자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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