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 축하는 못하겠다. 쿨하지 못해 미안해
12월 10일은 노벨상 시상식이 벌어지는 날이다. 이 무렵 스톡홀름은 도시 전체가 부산영화제 기간 부산처럼 들뜬 축제 분위기가 된다. 그런데 올해는 마냥 축하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논란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77 오스트리아) 때문이다.
이미 지난 10월 노벨상 발표 때부터 페터 한트케를 수상자로 선정한데 대해 말이 많았다.
한트케는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소망 없는 불행>,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등과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대본을 썼다.
문학상의 선정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은 한트케의 작품이 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평했다. 피터 한트케는 80년대부터 큰 인기를 얻은 작가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갖췄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세르비아의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공개적으로 옹호한 이력이 문제가 됐다. 한트케는 독재자 밀로셰비치와 가까운 사이로 학살을 부정하고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에서 직접 추도사를 읽기도 했다.
한트케의 친구 밀로셰비치는 1989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세르비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유고슬라비아 전쟁, 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전쟁에서 소위 비 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청소'라 부르는 학살을 자행했다. 반대파 정치인의 암살을 지시하고, 알바니아인 80만 명에 강제이주를 명령했다.
이를 피해 90년대 수많은 동유럽 주민이 스웨덴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기도 했다. 보스니아와 유고슬라비아계는 지금도 스웨덴 이민자 중 가장 큰 숫자를 차지하는 그룹 중 하나다.
한트케의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유족 협회를 비롯 여러 곳에서 인종주의, 증오와 폭력의 옹호자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는 것을 반대한다며 수상 철회 청원을 조직했고 노벨상 시상식장 앞에서 시위를 했다. 시위를 조직한 아드난 마흐무토비치 스톡홀름대 교수는 한트케는 보스니아인이라 부르는 대신 "세르비안 무슬림"이라 부르며 세르비아 이외의 동유럽인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그런 인물이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은 과거의 악몽을 되풀이하는 또 다른 공격이자 당시 희생자와 보스니아인들에게 사라예보에 다시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피해국인 알바니아와 코소보, 크로아티아, 터키 등의 스웨덴 주재 대사는 노벨상 시상식을 보이콧 했다.
스웨덴의 유명한 문학 평론가는 한트케의 수상 소식에 대해 "충격 그 자체"라고 말했다. 80년대 무렵까지 한트게는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 중 하나였으나 90년대 이후부터 후보군에서도 이름이 빠졌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2019년 화려하게 복귀해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까? 2017년 스웨덴 한림원의 미투 파문으로 한림원은 외부 심사위원을 초빙해 새로운 선발팀을 꾸렸다. 이번 노벨상 수상자는 외부위원 중심으로 선정했고 한림원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림원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페터 엥글란드는 과거 발칸 전쟁을 취재했던 기자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겠다 밝혔다. 과거 동유럽의 비극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에 동조한 한트케의 시상식에 참여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했다. 또 한 명의 심사위원도 자진 사퇴했다.
논란은 유럽을 넘어 번지고 있다. 당시 동유럽의 잔인한 현장을 목격했던 기자들이 SNS에 #BosniaWarJournalists라는 해쉬태그를 붙여 자신이 쓴 기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형식으로 한트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로저 코헨은 1994년 보스니아 강제수용소에 대해 쓴 자신의 기사를 공유하며 “보스니아 학살을 신화라 부르는 페터 한트케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라고 썼다.
한트케의 수상에 대한 곳곳의 문제제기에도 한림원은 노벨 문학상은 정치적인 상이 아닌 문학상이며 한림원은 문학적 우수성을 정치적 관점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시대의 주류 의견을 반영해 심사했다고도 했다.
아니 정말 글과 글쓴이를 분리할 수 있나? 글은 그 사람의 말과 생각,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면 혹시 모르겠다. 그리고 시대와 동떨어진 순수한 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나?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언제부터 정치가 윤리도덕과 분리되었지?
나는 고매한 스웨덴 아카데미의 전문가처럼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서 볼만큼 쿨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리고 과거는 과거로 묻어둘 줄 아는 주류가 아니라서, 그리고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 사람이라서 보스니아 사람들 편에 설 수밖에 없다.
한트케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스웨덴 한림원의 "용기 있는 결정에 감사"한다고 했다. 용기 있는 결정이라니, 스스로도 논란의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후회하는 기색은 없는 모양이다. 혹시 한트케가 한림원의 선정 이유처럼 현실과 문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여기고 있다면 부디 현실로 돌아와 사과하기 바란다. 쿨하지 못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