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유럽연구소 Aug 31. 2017

소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드리는 개인적인 이야기

내 책상에는 작은 소녀상이 놓여있다. 의자 위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단정한 단발머리의 입을 앙다문 야무진 소녀. 그 소녀를 만난 적이 있다.


10년 전 늦여름이니까 꼭 이맘때 일이다. 알고 지내는 일본의 사진가에게 연락이 왔다. 동료 한 사람이  한국에 촬영 차 오는데 통역 겸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역사 속 억압을 주제로 작업하는 중이고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촬영하러 온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속에 어떤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촬영을 하러 쉼터에 가기 전 사진가가 미리 만나자고 했다. 심리학을 전공한 사진가는 오랫동안 분쟁지역을 찍어왔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두고 앉아 있는 중년의 외국인이 보인다. 미간 사이에 짙은 주름이 잡힌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이름과 나이만 기록해줘요. 그때 상황을 설명해 달라든지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분들이 먼저 말하지 않는 한 내가 묻지는 않을 거니까. 이미 자료를 다 봤어요.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 텐데 다시 반복해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분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면 통역해주고 사진 찍을 때 내가 부탁하는 것만 전달해줘요. 자연스러운 분위기만 만들어주면 돼요.”


쉼터에는 사람이 많았다. 열 분의 할머니가 계셨고 손님들도 있었다. 인근 경찰서에서 한 달에 한 번 과일을 사서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했다. 할머니들과 경찰관, 자원봉사자분들, 사진가와 나는 마루에 둥글게 앉았다. 자원봉사자분들이 깎아준 과일을 먹으며 나는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했다.


“같이 온 사람 이름은 크리스 스틸레 퍼킨스라는 세계적인 사진가예요. 몇몇 동료 사진가와 함께 인류의 억압에 대한 주제로 사진을 찍고 있어요. 다시는 인류에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찍은 사진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하며 인류 역사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싶데요.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을 거니까 카메라는 특별히 신경 쓰지 마시고 늘 지내시던 대로 계시면 돼요.”


듣는 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진가는 곧 카메라를 챙겨 들고 구석으로 가 렌즈를 이리저리 만지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할머니들과 경찰관 아저씨들은 건강은 어떠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들과 할머니들은 친근해 보였지만 격의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할머니들은 서로에게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뭘 하면 좋을까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득 손 마사지를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교회에서 농촌 자원봉사를 갈 때 배워두었던 것이다.


“할머니, 손 마사지해드릴까요?”

“손 마사지요?”


할머니께 손을 내미니 부끄러운 듯 손을 주셨다. 작고 가늘고 주름진 손이었다. 원래는 좀 세게 힘을 주어서 지압을 하는데 그러면 부러질 것만 같아서 천천히 부드럽게 조물조물 주물러 드렸다. 한 손을 하고 나니 다른 손도 주셨다.


“고마워요. 손도 곱지. 정말 고마워요.”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할머니들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하셨다. 수줍어하셨지만, 좋아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하고 일상적인 접촉을 그리워하시는구나. 한참 손아래인 나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 할머니들에게 어떤 슬픔이 느껴졌다. 손주가 있다면 품에 안기고 보채고 할 텐데. 진짜 손녀가 있다면 나도 그 또래이니 그냥 편하게 대하셨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에.


사진가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초상을 찍어야겠어요. 기록해두고 싶어요. 빛이 좋으니 마당에 의자를 두고 한 분씩 사진을 찍을게요. 그때 옆에서 이름이랑 나이를 물어봐 줘요. 순서대로 기록해주면 돼요. 카메라를 마주하고 찍어야 해서 경직될 수도 있으니 자연스레 말을 걸어줘요.”


늦은 오후가 되면서 구름이 해를 가렸고 선선한 미풍이 불었다. 할머니들께 상황을 설명했다. 다들 기꺼이 마당으로 나와 화단 옆이며 마당 가 그늘께 둘씩 셋씩 자리를 잡았다.


“저를 보세요.”

사진가는 나지막이 간단한 주문을 했고 나는 할머니들 틈에 앉아 “카메라 봐주세요.”하며 바로바로 전달했다.

분위기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할머니들은 차례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은 할머니를 향해 “언제 그리 늙었데?” 하며 말을 걸기도 하고 “그거 기억나?”하며 마주 앉아 ‘쎄쎄쎄’를 하기도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셨다. 평화롭고 느리고 애잔한 오후였다.


마지막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가가 문득 물었다.


“그때가 몇 살이었나요?”


갑자기 유리에 쨍하고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냥 잠시 기억을 떠올려 옛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열넷이었지.”


할머니들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작가는 반복해서 말했다.


“힘들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줘.”


할머니들은 외국 사진가가 찍은 사진 옆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함께 넣어 세계 순회전을 할 거라는 말에 용기를 내신 것 같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어떻게든 알려야 하니까. 처음에 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트 없이 통역했었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트를 꺼내 꼼꼼하게 메모했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떤 압박 같은 것이 작동해 노력하지 않아도 눈물이 안 났고 정신없이 기록만 했다. 이상하게 그날의 풍경은 표정은 느낌은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인터뷰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진가가 떠난 후 전시 소식을 챙겼다. 전시 발문을 보았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자행한 성 노예 여성을 감추기 위한 말이다.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남태평양 전역과 한국에서 벌어졌다. 몇몇 한국 여성들은 놀라우리만치 용감했으며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모임을 조직했다. 그들에게 자행한 범죄를 시인하고 보상을 하라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사안을 공개하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한국을 촬영지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걸음 내디뎌 법정의 증언대에 선 이 여성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큰 희생인가. 나이 많은 여성으로 대중 앞에서 서서 어떻게, 몇 년 동안, 얼마나 조직적으로 침략군에 의해 강간과 학대를 당해왔는지 이제껏 숨겨온 과거의 트라우마를 말한다는 것이 말이다. 새로운 시대의 한국은 그들의 용기를 존경하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 이 작업은 그들을 지지하기 위한 헌사다.
얼마나 많은 ‘위안부’가 그곳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대부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단지 남아있는 몇몇이 반 세기 전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 앞에 증언하고 설뿐이다. 어쩌면 이 여인들은 살아남은 노예 중에 가장 오래된 이들일 것이다. 아프리카 역사에서 노예제가 사라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비슷한 일이 어떤 범죄조직이 아닌 한 나라의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용인되었다. 내가 이들을 이 시대의 노예(Contemporary Slavery)라는 프로젝트에 포함한 이유다. 나는 이 여인들을 앞에 두고 아주 단순한 초상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각 사진 옆에 증언을 담았다. 그 이상은 필요치 않았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는 것은 일종의 감정적 경험이었다. 통역을 통해 내게 이야기를 전할 때 그날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이 터졌다. 나는 이 장면은 찍지 않았다. 나는이 여인들을 내가 본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인간성을 무너뜨리는 잔인함에도 부서지지 않고, 존엄성을 지닌 강인한 여성, 존경한다.


그날을 가끔 떠올린다. 작가의 눈에 할머니들은 강인한 여인으로 보였지만 내 눈에 할머니들은 어느새 소녀가 되어있다. 주름도 흰머리도 그대로인데 그와 상관없이 나에겐 그저 소녀로 보인다. 아껴줘야 할 동생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정든 곳에서 울면서 떼어져 나왔을 그 나이, 친구들과 비밀 얘기를 하고, 쎄쎄쎄를 하며 까르르 웃으며 지내야 할 그 시절. 누가 내 동생이 아끼는 것을 빼앗아 간 것마냥 화가 나는데 되찾아 주지 못해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p.s.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모 할머니가 8월30일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이틀 전엔 28일에는 하상숙 할머니가 병환을 치료하던 중에 떠나셨지요. 올 들어 유난히 세상을 등지는 분이 많게 느껴집니다. 이제 35분의 생존자가 남아계십니다. 위안부 피해자를 할머니라 부르는 곳은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일을 피붙이의 일처럼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이 분들이 얼마나 용감하고 강인한 분들인지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그 용기,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장점돌. 2006. 빨레를 하는 중에 일본인에게 끌려갔다. 당시 열 네살이었다. 
길원옥. 2006. 일본인이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며 베이징으로 데려갔다. 열 셋이었다.
김긴자. 2006. 세 딸 중 맞이었다. 열 살에 아버지가 열 넷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친적집에 입양되어 살던 중에 한국인 브로커가 위안소로 데려갔다.
김순악. 2006. 가난한 집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실공장에 간다는 말을 듣고 따라갔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갔다.
이순덕. 2006. 열일곱살에 밭에서 추수를 돕고 있다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
박옥선. 2006. 8남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직물공장인 줄 알고 간 곳이 위안소였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박옥련. 2006. 스무살에 남편이 직업소개소에 팔아 넘겼다. 군인들 빨래를 하는 곳이라고 알고 간 곳이 위안소였다.
이옥선. 2006. 열여섯살에 두 명의 남자에게 납치되어 끌려갔다. 처음에는 공항을 짓는다고 말했다.
이용수. 2006.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정부, 아버지는 쌀농사를 지었다. 친구 말에 일본사람 공장에서 일하면 옷과 가죽신을 준다고 해 따라갔다.


                                                     (C)Magnum Photos/Chris Steele-Perkin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