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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Oct 31. 2022

대우조선해양의 철거와 시대의 종말

날이 좋아 점심 시간에 오랜만에 청계천을 따라 걷는데 한창 철거중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꽤나 큰 빌딩이라 자세히 살피니 맙소사 대우조선해양 본사 건물이 아닌가.

종각 금싸라기 땅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기세는 온데간데 없고 앙상한 철골 뼈대만 남은 모습이 어쩐지 서글프다.


기업체 세일즈를 담당했던 20대의 어린 나에게 대우조선해양은 최애 거래선이었다.

특수선과 방산, 플랜트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해외 vip를 자주 초대하며 늘 내 한 달 실적 top  3 안에 들던 매우 우수한 고객이었다.

각 프로젝트의 담당자들 역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쾌활한 훈남들이었고 나이며 배경이 비슷했던 우리는 종종 고객과 세일즈 매니저의 관계를 넘어 친구가 되곤 했다.


당시 자주 들르던 이태원의 어느 클럽에서 함께 데킬라 샷을 들이키기도 하고 그러다 만취한 나를 업어 택시를 태워 보내주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20대를 넘겨 갓 30대가 된 이후에도 종종 을지로 인근에서 술잔을 기울였고 내가 세일즈를 그만 두던 날에는 장문의 감사 편지를 전달해 나를 울리기도 했던 대우조선해양의 젊은 직원들.

스트레스가 심했던 영업직이었지만 대우조선해양을 방문할 때만큼은 친구네 집 놀러가듯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던 나의 젊은 시절.


대우조선해양의 매각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던 마음이 눈 앞에서 철거되는 건물을 보자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던 1층 로비 카페도, 발렌타인 데이에 작은 초콜릿 쿠키를 배달하던 사업부 사무실도 이제 더는 없다.

함께 웃고 떠들던 훤칠한 젊은 대리며 사원들도, 그리고 싱그럽고 푸르던 그 시절의 나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 어쩌면 내 인생에서도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밝고 철없고 즐겁던, 내가 사랑한 그녀와 이제는 작별할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담담히 이별을 받아 들이고 조금은 시니컬하고 얼마쯤은 염세적으로 변해 버린 낮아진 텐션의 중년을 시작하기로 했다.

왠지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은 계절 탓이겠거니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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